(64강) 삼상 24:1-7 사울을 살려줌

<본문>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따르다가 돌아오매 혹이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더이다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길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삼상 24:1-7)

<설교>

지난 시간에는 ‘셀라하마느곳’(분리하는 바위)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비록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노력을 하지만 다윗은 이미 하나님이 붙드시고 책임지고 계셨기 때문에 사울도 다윗의 생명만큼은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다윗은 택함 받은 자로 사울은 버림 받은 자로 구별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사울에 의해 해를 입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이 쫓김을 받고 수많은 위기를 겪게 되는 것도 결국 다윗의 신앙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블레셋을 치기 위해 발길을 돌렸던 사울이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1절에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따르다가 돌아오매 혹이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더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울이 블레셋을 치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다윗을 잡기 위해 돌아왔다는 것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블레셋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돌아온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다시 돌아왔을 때 누군가가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사울은 삼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을 잡기 위해 갑니다. 그리고 3절을 보면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르렀을 때 굴이 있는데 사울은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발을 가리우러 들어갔다는 것은, 어떤 사람은 사울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 즉 잠을 자기 위해 들어갔다고 해석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용변을 보기 위해 들어간 것을 표현하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용변을 보기 위해 쭈그려 앉을 때 긴 옷이 그 발을 가리기 때문에 그러한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들어간 굴의 깊숙한 곳에는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거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그것을 미처 알지 못하고 단지 굴이 있기에 용변을 보기 위해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다윗 입장이라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쫓아다니는 다윗의 원수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지금 자기 앞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생리현상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울을 뒤에서 가만히 공격하면 사울을 죽이기는 쉬울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만 죽으면 자신의 고난도 끝날 것이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편안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분명 하나님이 준 기회로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의 사람들도 말하기를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4절)라고 합니다. 다윗이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은 누구에게나 동일할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과 연계하여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면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주신 기회 등등으로 이해를 하고, 불리한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으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아마 다윗의 사람들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의 공통적인 좁은 소견일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서 다른 이해와 생각이 나온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은 내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편으로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에서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편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일하시는 분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다윗은 같은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4절 마지막 부분을 보면 다윗이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벱니다. 사울을 잠을 자고 있는 것도 아닌데 겉옷자락을 몰래 벨 수 있었다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상황이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아니합니다. 오히려 사울의 옷자락 벤 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찔렸습니다(5절).

알다시피 사울은 다윗의 원수입니다. 사울만 죽으면 편안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지금 다윗의 수중에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러한 사울을 죽이기는커녕 옷자락을 벤 것을 가지고도 마음이 찔린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마음은 과연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입니까? 오늘은 다윗에게서 이것을 배우고자 합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고 옷자락을 벤 것으로 인해서조차 마음이 찔려 하는 이유는 6절의 “자기 사람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즉 사울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종이라는 이것이 사울을 죽일 수 없게 하는 이유였던 것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신약의 입장에서 살펴본다면 메시야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울에게서는 그러한 의미보다는 다른 의미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기름 부음은 메시아란 의미와 함께 구별된 자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구별하여 세웠다는 의미로 기름을 붓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다윗이 사울을 기름 부음 받은 자로 보고 죽이지 않은 것은, 사울을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 구별하여 세운 자로 봤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쓰시는 자를 자신이 해할 수 없다는 것이 다윗의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결코 사울이 뛰어난 신분이거나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사울은 하나님에 의해 버림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존재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사울을 다윗에게 붙이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좋은 기회’ ‘유리한 상황’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증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좋은 기회니까 분명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은 자기중심과 자기 입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물일 뿐입니다. 그 어떤 상황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원리를 대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상황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로 남겨지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유리한 상황이든 불리한 상황이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발생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배우게 하는 수단이며 도구일 뿐이지 유리한 상황 자체를 하나님의 뜻으로 베푸시지는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현재의 상황이 나에게 불리한 것이든 유리한 것이든 우리는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합니까? 중요한 것은 다윗의 시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다윗의 개인적인 입장에서 사울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라는 입장에서 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별하여 쓰시는 사람이라는 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을 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나아가게 한 것입니다.

4절의 다윗의 사람들이 한 말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말씀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사울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한 말씀이 있었다면 누구나 사울이 다윗이 숨어 있는 굴에 들어온 것을 하나님이 사울을 다윗에게 붙이신 것으로 여기지 않겠습니까?

물론 사울을 다윗이 숨어 있는 굴로 들어가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따라서 사울을 다윗에게 붙였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울을 다윗에게 붙였다고 해서 다윗이 죽여도 된다는 것은 없었습니다. 4절의 말대로 한다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선한 대로 행하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즉 다윗이 생각하기에 옳은 대로 행하라는 다윗에 대한 시험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험에서 다윗이 보기에 선한 것은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세우신 자이기 때문에 자기 멋대로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이 다윗에게는 선한 것이었습니다.

신자의 행동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결정되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행동을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나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를 생각하기 전에 하나님 중심인가 내 중심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록 나에게 불리한 길이라 할지라도 말씀이 지시하는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윗이 무엇 때문에 사울을 살려 줬는가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시각이 오늘 우리의 시각이 되어야 함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현재를 어떤 시각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돌아보십시오. 분명 다윗의 사람들이 다윗에게 한 말 그대로의 입장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나에게 유리한 상황을 하나님의 인도라 여기며 내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 기대는 것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에 대해 보복하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해를 입히고 불리하게 했다면 그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음을 먼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에 그러한 생각으로 나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가르치고 시험하시기 위해 세우신 하나님의 도구이기에 내가 그에게 보복할 수 없음을 생각하고 그것을 선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런 생각에 머무는 그 분이야 말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신자라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19절에 보면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합니다.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는 것은 원수 갚는 권세는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해야 할 일은 다만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는 길에 행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원수라 할지라도 신자가 행해야 할 바는 정해져 있습니다. 대상은 내가 스스로 구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악에게 악으로 대항하는 것이 악에게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선한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다만 그 길로만 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