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강) 삼상 24:8-22 다윗과 사울의 다른점

<본문>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가로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사울에게 이르되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붙이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혹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치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였나이다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판결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신원하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가로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내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붙이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사람이 그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날 내게 행한 일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비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라 다윗이 사울에게 맹세하매 사울은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가니라(사무엘상 24:8-22)

<설교>

오늘 설교의 주제는 ‘다윗과 사울의 다른 점’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본문을 읽고 이 주제를 생각하면서 주제에 대한 답을 이미 나름대로 짐작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다윗과 사울의 다른 점은 본문에 명확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명확히 드러나 있는 사실 조차도 바라보는 시각여하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이해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저는 이 주제를 중심으로 말씀드리면서 신자가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신자에게 있을 수 있는 잘못된 이해와 사울식의 생각, 또한 우리에게 있는 허점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다윗과 사울의 다른 점은 인간의 상식선에서 생각하면 제가 다른 말씀을 드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미 답은 내려져 있습니다. 알다시피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 다녔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놓아줍니다. 이러한 것에서 사울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으로, 다윗은 원수를 은혜로 갚는 사람으로 보여지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과 사울의 다른 점은 뻔하지 않습니까? 결국 이 뻔한 답을 가지고 설교를 한다면 다윗처럼 ‘악을 선으로 갚는 사람이 되자’라든가, ‘원수도 사랑하자’라든가, ‘은혜를 베풀며 살자’라는 말을 하게 되지 않겠습니다. 물론 그 말 자체는 잘못된 것이 없지만 결국 주체가 인간으로 등장하게 되는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도덕과 윤리가 성경과 맞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도덕과 윤리의 주체는 인간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변화하고 개혁하고 악한 것을 하나하나 극복함으로써 좀더 나은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 도덕과 윤리의 주된 목표가 아니겠습니까?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바로 이부분입니다. 본문처럼 성경이 위대한 인간의 선한 행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그 사람을 본받아 선한 행위를 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질 것을 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선한 행위를 하는 것 자체를 신자됨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기독교와 타종교의 구분과 차별이 사라지게 됩니다. 오늘날 ‘모든 종교는 추구하는 바가 같다’고 하면서 종교 일치를 주장하는 기독교인들도 주체를 인간에게 두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을 펼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것은 지극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며, 이처럼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신자다워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주체를 하나님께 두게 되면 전혀 다른 이해가 제기됩니다. 즉 전혀 다른 차원에서 다윗과 사울의 다른 점이 돌출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상식을 뒤 엎으면서 인생을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주체로 하는 것과 인간을 주체로 하는 것의 차이가 너무나 첨예하게 드러남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숨어 있는 굴에 들어온 사울을 죽임으로서 자신의 안위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포기하고 사울을 살려준 다윗은 사울이 굴에서 나가자 그 뒤에 서서 굴에서 벤 사울의 옷자락을 보여주며 왕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죽이지 않았음을 외칩니다. 자신은 이처럼 왕을 죽일 의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다윗이 왕을 해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12절)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과 사울의 사이에 여호와를 개입시킵니다. 의로우시고 천지를 주장하시고 다스리시는 여호와를 개입시킴으로서 자연스럽게 ‘판단은 여호와가 하신다’는 결론이 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다윗 스스로 사울을 악하다고 판단하고 그에게 보복을 했다면, 그것은 인생의 주체는 자기 자신임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인생에, 그리고 사울과의 관계에 여호와를 개입시킵니다. 그러자 자신은 뒤로 물러 나 있을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보복도 판단도 자신의 몫이 아니고 자신의 할 일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왕에게 보복하신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왕에게 보복하실 것이니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주체로 살아가는 인생이며 여호와가 개입되어 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굴에 들어온 사울을 보고 다윗의 사람들이 다윗에게 말했던 내용은 하나님이 사울을 다윗에게 붙이신 것이니 사울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곧 인간을 주체로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인간이 주체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을 이롭게 하고 일이 잘 풀리는 쪽으로 되어지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인생의 중심에 자신을 두고 있으며 하나님은 자신을 돕는 분으로 내 옆에 자리하시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주체로 하는 인생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즉 하나님이 주체자시기 때문에 인생에서 자신을 뒤로 물러 날 수밖에 없음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여호와께 맡기게 됩니다. 이것이야 말로 신자다운 모습이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살려준 것은 다윗의 인품이 훌륭해서도 아니고 성격이 좋아서도 아닙니다. 다윗을 하나님을 사울과의 일에 개입시켰습니다. 그러자 내려지는 결론은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보복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다윗은 판단자의 위치에 자신을 두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선함이었습니다.

자기 인생에 하나님을 개입시켰을 때 내려지는 결론은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이 알아서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설사 결과가 나에게 불리하게 되어진다 할지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기에 모든 것이 나에게 선으로 남게 되어질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맡기며 살아가는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믿음의 사람에 의해서 하나님이 세상에 증거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강한 모습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인생에 하나님을 개입시키되 여전히 내가 주체가 되어 있고, 따라서 내 일을 유리하게 만들어 주고 도와주는 분이라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것이 다윗과의 다른 점입니다.

이처럼 사울을 죽이지 않는 다윗의 행위는 인격이나 윤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니 자신이 판단자로 보복자로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여기에는 자기 인생에 대한 또 다른 이해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내 인생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는 시각입니다. 이것은 신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시각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이 잘 되지 않고 실패할 때 분노하게 되고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왜 분노하고 원망합니까? 그것은 내 것이 사라졌다는 것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생에 하나님을 개입시킨다면 그것은 내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나의 주인도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의 주인으로 행세했다면 그것은 내 스스로 하나님을 배척하는 자로 살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오신다면 주인 행세를 한 우리를 뒤로 물러나는 것이 옳습니다. 따라서 인생에 하나님을 개입시키는 것은 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하는 것이며 내 것은 없기에 잘되든 못되든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인생이 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믿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신자다운 모습에 존재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본분인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왕은 사울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사울은 누구를 따라 나온 것입니까? 사울이 따라 나온 자는 다윗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는 말은 자기 자신을 죽은 개와 벼룩으로 비유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전혀 가치 없고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말하는면서 그러한 자신을 왕이 왜 쫓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을 죽은 개나 벼룩으로 보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아무것도 아님을 알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다윗이 사울에게 하는 말은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쫓기보다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모든 주체를 하나님께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재판장이 되셔서 판단하시고 보복하실 것임을 알기에 자신이 복수자로 나서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하나님께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울은 어떻습니까? 다윗의 말을 들은 사울은 울면서 말하기를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17절)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을 보면 사울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 뉘우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울면서 말할 정도라면 그렇게 보여지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사울은 다윗의 말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감정의 변화를 보임으로써 운 것일 뿐이지 자신의 악에 대해 깨달은 울음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울면서 다윗을 자기보다 의롭다고 말한 사울은 나중에 또 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달려들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울음이 일시적인 감정의 변화라는 것은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는 말에서 드러납니다. 사울은 너는 의롭고 나는 악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의롭다는 말을 합니다. 이 두 말은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나보다 의롭다는 말은 다윗이 자신보다 조금 낫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데 다윗은 자신을 살려준 것에서 다윗이 자기보다 더 관대한 성품을 가진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주체로 하여 인간을 서로 비교하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을 비교할 때는, 서로의 행동이나 성품 등을 비교함으로써 누가 좀 더 나은 사람인가로 판별합니다. 행동이 좀 더 선하고, 성품이 좀 더 부드럽고 관대할 때 더 나은 인간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보다 낫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끝까지 자신의 죄인 됨을 보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주체자로 했을 때 그 앞에서 인간은 죄인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은 성품이나 행동으로 구분되기 보다는 하나님을 아는가 모르는가로 구분되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9절에 보면 “사람이 그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날 내게 행한 일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이 말 역시 다윗의 선한 행위에 대해 하나님이 갚으실 것이라는 말이지만, 사울은 여전히 자신을 보지 않고 있습니다. 다윗으로 인해서 드러나는 자신의 죄악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자기보다 조금 착하게 보인 사람을 칭찬하는 정도에 불과할 뿐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칭찬하는 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에게서 믿음을 봤다면 상대적으로 믿음이 없는 자신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는 나보다 낫다’는 말을 하기 보다는 ‘너는 의롭고 나는 악하다’는 말을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울은 자신에게 잘해준 다윗을 칭찬하는 것이 전부일 뿐입니다. 이것이 곧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있고 중심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 자신에게 잘해주면 고마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를 칭찬합니다. 의롭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칭찬하시고 의롭다 하시는 것은 사람에게 잘 대해주는 것이 기준이 아니라 인생의 주체를 하나님께 두고 살아가느냐가 기준이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울은 다윗이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나라가 다윗의 손에 견고히 설 것도 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비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라”(21절)고 말합니다. 이 말 역시 끝까지 자기 집안을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은 전혀 보지 않고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집착만을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다윗과 사울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까? 이들의 다른 점은 성품 차이가 아닙니다. 사울은 성품적인 면에서 다윗이 자신보다 낫다는 말을 했지만, 이들의 다른 점은 하나님을 주체자로 하는 것과 인간을 주체자로 하는 것의 차이였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은 뒤로 물러나는 것과 끝까지 자기 것을 지키고자 하는 집착의 다른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보는 것과 하나님보다는 인간을 보고 있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주인이시고 왕이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분이 책임지고 계십니다. 때문에 우리가 책임져야 할 부분은 없습니다. 우린 다만 어떤 일에서든 주인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나의 주인 되시는 분을 세상에 알리고 증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자는 바로 그러한 역할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역할에 충실한 자가 곧 하나님의 백성이고 쓸모 있는 신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