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강) 삼상 25:2-13 다윗과 나발

<본문>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 양털을 깎고 있었으니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 다윗이 광야에 있어서 나발이 자기 양털을 깎는다 함을 들은지라 다윗이 이에 열 소년을 보내며 그 소년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이같이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네게 양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상치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네게 고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로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 다윗의 소년들이 가서 다윗의 이름으로 이 모든 말을 나발에게 고하기를 마치매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이에 다윗의 소년들이 돌이켜 자기 길로 행하여 돌아와서 이 모든 말로 그에게 고하매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각기 칼을 차매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사백 명 가량은 데리고 올라가고 이백 명은 소유물 곁에 있게 하니라(사무엘상 25:2-13)

<설교>

제가 ‘교회가 신앙생활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몇 번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하시는지 모르겠는데 이 말은 교회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인해서 신앙생활 자체가 엉뚱한 쪽으로 나아가게 될 수 있음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교회는 신앙생활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신앙생활의 기준이 되어버리면 결국 예수님은 소외되어버리고 예수님 자리에 교회가 위치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해 어떻게 하느냐로 신앙의 정도를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신앙은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며 주님의 마음과 일치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신자란 교회를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동의하면서도 교회와 주님을 일직선상에서 생각함으로써 교회에 하는 것이 곧 주님께 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이 무엇인가부터 새롭게 정립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 상식에서 신앙을 이해할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신앙의 본질을 찾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다윗과 나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간단한 내용 같으면서도 생각하기에 따라 이해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본문의 이야기를 간단히 살펴보면, 마온에 나발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양 삼천 마리에 염소 이천 마리를 소유하고 있는 매우 부자였습니다. 이 사람이 양털을 깎을 때 다윗이 열 소년을 그에게 보내어 나발의 소유 중에 얼마를 나눠 받아 오라고 지시합니다. 물론 무작정 받아 오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7절에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상치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발의 목자들이 다윗과 함께 있음으로 인해서 하나도 잃은 것이 없이 보호를 받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즉 우리로 인해서 보호를 받았으니까 나발에게 있는 것 중에 얼마를 나눠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이러한 요구가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무리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일단 나발이 다윗에게 보호를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우리 때문에 너희가 보호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다윗의 일방적인 주장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나발의 목자들이 다윗의 사람들과 함께 있었지만 우리가 그들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억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불량배가 근처 작은 가게를 찾아가서 ‘여기는 우리 구역인데 우리가 당신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았으니까 그 보답으로 돈을 내놔라’고 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요구에 대해 나발은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10,11절)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나발의 반응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윗을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다윗도 모르고 나발도 모르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나발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와서 ‘내가 당신에게 해코지를 안했으니까 그 보답으로 돈을 얼마 나눠달라’고 말한다면 ‘예 내가 당신 보호 때문에 살았습니다’라고 하면서 순순히 돈을 내놓겠습니까? 상대방의 협박이 두려워서 억지로 내어 놓는 것이 아닌 바에야 감사함으로 소유를 나눠주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나발의 반응을 극히 정당하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발의 반응에 대해 다윗은 어떻게 합니다. 13절에 보면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각기 칼을 차매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사백 명 가량은 데리고 올라가고 이백 명은 소유물 곁에 있게 하니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칼을 찬 사백 명의 사람을 데리고 나발에게 쳐들어가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행동을 과연 정당하다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깡패와 같은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의 것을 갈취 하는 행동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많은 사람들을 초점을 다윗의 잘못에 두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은 살려주면서 소유를 나눠주지 않았다고 해서 나발을 쳐들어가는 것은 긍휼을 잃어버린 처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 다윗의 입장에서 나발과 사울을 비교하면 나발보다는 사울이 더 큰 원수일 것입니다. 나발은 단지 소유를 조금 나눠 달라고 한 부탁을 거절했을 뿐이지만 사울은 다윗의 목숨을 노린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니 미워도 나발보다는 사울이 더 미운 것이 당연하고 분노를 해도 나발보다는 사울에 대한 것이 더 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울에 대해서는 죽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살려주기까지 하면서 나발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공격을 하는 분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나발을 치는 다윗의 행위는 순간적으로 긍휼을 잃어버린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해석도 일리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저는 그것보다는 다른 의미에서 본문을 이해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7절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7절의 다윗의 말은 분명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억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나발의 목자들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구실 삼아서 재물을 요구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발에게는 터무니없는 말로 들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누구냐?’라는 말로 다윗을 철저히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바꾸어 생각하면 다윗의 사람들이 나발의 목자들을 해롭게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다윗의 사람들의 형편은 결코 좋은 편이 되지 못합니다. 쫓겨 다니는 입장이기 때문에 생계를 유지하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형편에서 나발의 목자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은 것은 사실 감사할 일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나발이 지금 양털을 깎게 된 것은 다윗이 힘든 형편에서도 자기들의 목자에게 해를 입히지 않은 까닭이라는 말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현재 상황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만약 나발의 목자들에게 외부인이 침입을 해서 많은 해를 입히려고 할 때 다윗의 사람들이 나타나서 그들을 구해주고 재산을 보호해 줬다면 나발도 달리 반응 했을지도 모릅니다. 다윗의 도움을 받았다는 분명하고도 뚜렷한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사람들은 그냥 그들과 함께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부분입니다.

15-16절을 보면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상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한 소년이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에게 다윗이 나발을 치는 것에 대해 고하는 것인데 여기 이 소년은 아마 나발의 목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목자로 있을 때 다윗의 사람들이 어떻게 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년은 다윗이 자신들을 해하지 않은 것에 대해 선대했다고 말합니다. 그 덕분에 상하거나 잃은 것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마치 다윗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해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서 우리가 괜찮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또한 나발의 목자들이 양을 지키는 동안에 다윗의 사람이 함께 함으로써 우리에게 담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다윗의 사람들이 자신들과 함께 해준 것만으로도 자신들이 보호를 받은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나발의 목자들을 위해서 눈에 드러난 큰 도움을 준 것이 없다 할지라도 다윗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해하지 않고 함께 해준 것 자체가 크나큰 도우이며 보호하심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발은 이것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나발은 다윗이 실질적으로 눈에 뜨인 도움을 준 일이 없음을 상기했는지도 모릅니다. 즉 자신의 소유를 나눠줄 만한 가치 있는 일을 하지 않았음을 생각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이 함께 했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철저히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예수님에 대해 우리들의 생각과 연결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도우심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분명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도우심을 나발식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즉 실질적인 도움을 원하는 것입니다. 눈에 띄고,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도움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 말에 대해 실감하지를 못할 것입니다. 이유는 주님이 함께 하신다고 해도 그 표가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지금보다 더 나아져야 하고, 없던 돈도 생기면서 갈수록 풍족해지고 윤택해져야 되지 않느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어려움에서 당장 빠져 나오게 하는 실질적 도움을 원하고, 그러한 함께 하심을 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과연 우리가 주님에게 어떤 도움을 받아야 할 자격이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실질적인 도움을 주시기를 원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해를 입히고 우리의 것을 빼앗는다고 해도 할말이 없는 입장에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해를 입히지 않으시고 함께 해주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주님이 우리를 선대하고 계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주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든든한 담으로 존재하셨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간과한다면 우리는 나발식으로 주님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받은 것이 없는데 뭐 내 놓겠는가라는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이 2003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곰곰이 한해를 돌아보십시오. 한 해 동안 주님에게 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도움으로 살았음을 몸으로 느끼십니까? 혹시 변함없이 그저 그렇게 살아온 한해였기에 주님이 함께 하셨음을 특별히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신자된 우리에게는 주님이 함께 하심 자체가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순간도 그리스도를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함께 하신 덕분입니다. 일년 동안 살아온 모든 것이 주님이 함께 하신 덕분입니다. 일년 동안 아무 일 없이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고마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발은 다윗이 함께 하지 않았어도 별 문제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선대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무 일 없이 평범하게 살았다고 해서 주님이 함께 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나마 그렇게 살아올 수 있었음을 생각하십시오. 오늘 당장 죽는다고 해도 할말이 없는 우리인데 지금 이처럼 살아있는 것만도 크신 은혜임을 생각하십시오, 그럴 때 내게 있는 것이 내 것이 아니며, 지금 나에게 소유된 것도 주님이 함께 하신 덕분이며 나를 선대하신 때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이웃을 향해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향해 나누게 되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아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지금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님을 절실히 깨달을 때 자연스럽게 나누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알고 주님과 동행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을 떠나서 단지 교회 일에 열심인 것을 내세워서 신앙으로 높이는 것이라면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나발은 완고하고 행사가 악한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나발이 마치 불량배 같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악함과 완고는 다른 차원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인간에 대한 도리와 규칙을 기준으로 해서 악함을 평가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을 기준해서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욱 의지하는 것을 완고함으로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을 악함으로 말합니다. 나발이 이런 사람이었기에 다윗의 함께 함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다윗이 함께해주지 않았어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함과 완고함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복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해하지 않으신다는 것 자체로 우린 이미 큰 은혜를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이 우리를 해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버립니다. 주에 대한 인식을 마치 성인군자라는 차원에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같이 사랑이 있으신 분이 어떻게 우리를 해하실 수 있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틀린 생각합니다. 우리의 행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 하나 신앙에서 살아가는 것이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해하셔서 아무 할 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주님이 해하기는커녕 우리의 담으로 반석으로 계십니다. 그 덕분에 지금의 내가 존재함을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 심지어 숨쉬는 것 하나까지 주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었습니까? 더 큰 어려움이 있어서 할 말이 없는 사람임을 생각하십시오. 감사함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함께 하신다는 그것만으로 신자는 든든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