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강) 삼상 25:14:22 다윗의 분노

<본문>

소년 중 하나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고하여 가로되 다윗이 우리 주인에게 문안하러 광야에서 사자들을 보내었거늘 주인이 그들을 수욕하였나이다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상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 그런즉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을 알아 생각하실지니 이는 다윗이 우리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음이니이다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 아비가일이 급히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 준비한 양 다섯과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을 취하여 나귀들에게 싣고 소년들에게 이르되 내 앞서 가라 나는 너희 뒤에 가리라 하고 그 남편 나발에게는 고하지 아니하니라 아비가일이 나귀를 타고 산 유벽한 곳으로 좇아 내려가더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자기에게로 마주 내려오는 것을 만나니라 다윗이 이미 말하기를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중 한 남자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사무엘상 25:14-22)

<설교>

의사가 병을 고치는 것은 그 사람의 재능이며 기술입니다. 때문에 스스로 고쳐본 경험이 있는 질병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고칠 수 있다고 나설 수가 있습니다. 의사뿐만이 아니라 자동차 정비사, 건축가 등등 기술과 재능을 요하는 모든 분야에서는 인간이 경험하고 습득한 재능과 기술이 발휘되어서 모든 일을 성취하게 됩니다. 재능과 기술은 날마다 반복된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실수가 아닌 이상 어제는 할 수 있었던 일을 오늘은 하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어제 있었던 기술과 재능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면 모르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기술과 재능은 인간의 몸에 축척되는 것이기에 몸이 고장 나지 않는 이상 갑자기 사라진다거나 기술력을 잃어버리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기술력이 사라졌다가 다시 생기는 성질의 것이라면 사회적으로는 큰 혼란이 발생하게 될 것이고 인간의 경험과 경력이라는 것도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기술과 재능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분명 경험이며 경력입니다. 1년간 환자를 돌본 의사와 10년간 환자를 돌본 의사의 기술력이 같을 수 없는 것처럼 기술은 경험 속에 쌓아져가는 것이고 따라서 세월이 흐르고 많은 경험을 할수록 실력 있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과 재능 경험과 경력 등등이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무의한 분야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애당초 믿음은 우리의 실력이 아닙니다. 경험도 아니고 재능으로 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의 경험이 많다고 해서 실력 있는 신앙인이 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가령 누군가를 용서한 경험이 있다고 할 때, 그 경험이 실력이 되어서 다음에는 용서를 더 잘하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은 용서를 했는데 내일은 용서한 자신의 일을 잊어버리고 분노하고 미움만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신앙 경력과 경험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를 몇 년을 다녔다느냐는 것은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질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를 들여다보면 믿음을 실력과 경험으로 오해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출석한 사람보다는 십년 이십년 교회를 출석한 사람이 신앙에 있어서는 더 우위에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신앙은 경험과 년 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경험과 출석 년 수로서 다른 사람과 차별을 두려고 하는 것을 지극히 삼가야 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도 이러한 점을 생각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윗은 나발이 양털 깎는 날에 소년을 보내서 나발의 소유 중에 얼마를 줄 것을 요구합니다. 이 요구에 대해 나발은 철저히 무시해 버리고 결국 다윗은 분노하여 칼을 찬 사람 400명을 데리고 나발을 칠 계획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계획을 나발의 소년 중 하나가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에게 고하게 되고 아비가일은 먹고 마실 것을 많이 준비하여(18절) 다윗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은 아비가일을 만났을 때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중 한 남자라도 아침까지 남겨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은 나발과 나발에게 속한 모든 남자까지 한 사람도 남겨두지 않고 죽이겠다고 맹세까지 할 정도로 나발에 대해 분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발에 대한 다윗의 분노를 대하면서 한가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나발보다 더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사울은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죽이지 않고 놓아주면서 나발에 대해서는 왜 이토록 분노하고 죽이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24:12절에서 다윗이 말한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라는 구절을 보면 다윗은 분명 판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보복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이 악하다면 그의 악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보복하실 것이기에 자신은 보복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이 왜 나발에 대해서는 친히 보복하기 위해 나서는 것입니까? 원수인 사울을 그냥 놓아준 다윗이라면 나발에 대해서도 판단하시고 보복하실 분은 여호와임을 알고 그분께 맡기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나발에 대해서는 사울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발을 치는 다윗의 행위가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25:33절의 “또 네 지혜를 칭찬할찌며 또 네게 복이 있을찌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는 구절을 보면 다윗은 자신의 행위가 정당치 못한 것임을 아비가일로 인해서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친히 복수할 뻔한 것을 아비가일이 막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친히 판단하시고 보수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다윗이 나발에게는 왜 친히 보수하려고 했을까요? 하나님이 친히 보수하신다고 하면서 사울을 놓아준 다윗의 믿음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이 점을 생각함으로써 믿음은 무엇이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일단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믿음은 실력도 재능도 기술도 경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쌓아가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제 잘한 사람이라면 오늘도 잘할 것이고 어제 못한 사람은 오늘도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믿음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은혜입니다. 단 한번 주어진 것으로 충족되는 은혜가 아니라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라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믿음과 은혜의 관계입니다. 믿음을 은혜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을 보이지 않지만 은혜로 믿음이 주어졌다는 것에서 많은 오해가 발생합니다. 즉 은혜로 믿음이 주어졌기 때문에 믿음이 나에게 존재한다고 여김으로써 믿음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처음에는 은혜이지만 다음부터는 자신의 실력으로 등장해 버리는 것이 현대 교인들의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은혜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은혜가 아니면 한순간도 믿음에 머물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이고 악함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조차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써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그가 나발에 대해서는 극도의 분노를 보이며, 나발에 속한 모든 남자들을 죽이기로 맹세까지 하는 악함을 보입니다. 단 한 번 모욕당한 것으로 인해 땅을 온통 피로 물들일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 생각은 분명 정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을 대했던 다윗의 성품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은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믿음에 거할 수 없음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사울을 죽이지 않고 놓아준 다윗의 믿음이 실력이었다면 나발에 대해서도 같은 실력이 나와야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실력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울과 나발의 경우가 각기 다르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다윗을 그토록 분노하게 했습니까? 사울과 나발을 두고 비교하자면 사울이 훨씬 더 다윗에게 악행을 저지른 사람입니다. 나발은 한번 다윗을 모욕한 것으로 그치지만 사울은 계속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녔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을 죽이려 하는 원수고 다른 한 사람은 단순히 자신을 무시하여 자존심을 상하게 한 사람일 뿐입니다. 누가 봐도 나발보다는 사울에게 더 분노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수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분노하는 이유는 다윗이 나발에게는 뭔가를 기대했다는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자신을 잘 대해주기를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적대감을 가지고 자기를 죽이기 위해 쫓아다니는 사울에게 익숙해져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울에 대해서 어떤 선도 기대하지 않은 이상 사울이 어떻게 대하든 분노가 일어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의 적대감에서도 하나님이 보수하심을 생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나발의 경우는 다릅니다. 21절의 “다윗이 이미 말하기를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는 말을 보면 다윗은 나발이 자신을 우호적으로 대할 것을 기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덕분에 나발의 소유가 온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발이 자신의 은혜를 알고 자기 요구에 우호적으로 대할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대가 무너지고 오히려 무시함을 당했을 때의 분노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경우가 없습니까? 평소 자신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고 험담을 자주 하는 사람이 자신을 욕하는 경우 자기 마음을 조금만 추스르면 얼마든지 너그러움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 사람에 대한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쉬운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절친한 사람이거나 평소 도움을 많이 주었던 사람이 자신에 대해 험담을 하거나 욕을 하고 다니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분명 사이가 나쁜 사람에 대해서보다 더 큰 분노가 일어날 것입니다. 저 사람은 나에게 좋게 대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더 큰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줬다 할지라도 ‘내가 저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잘 대해줬으니까 저 사람도 나를 선하게 대할 것이다’라는 기대는 갖지 않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때문에 누군가를 도왔다 할지라도 ‘주님의 은혜가 나를 행하게 한 것뿐이다’라는 생각에 머물 뿐, ‘내가 저 사람을 도왔다’는 생각에까지 나아가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저 사람을 도왔다’라는 생각이 ‘저 사람은 나에게 우호적으로 대해야 한다’라는 기대를 갖게 하고 그러한 기대가 결국 어느 순간에 배신감과 분노를 가져오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배신감과 분노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이나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것에 걸림돌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를 짓지 말라는 뜻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신자는 반복되는 믿음의 실패에서 자신을 지켜주실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함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날마다 경험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음을 자신의 죄악으로부터 발견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력으로는 한발자국도 믿음을 행해 나아갈 수 없음을 발견하는 것이 은혜이며 믿음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발에 대한 다윗의 분노에 대해 의아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울을 놓아준 다윗이 왜 나발에게 분노할까?’라는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애당초 사울을 놓아준 것은 다윗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은 실력이 아님을 알아야 하고, 과거의 성공이 미래의 실패를 막아주지 못하며, 과거에 잘했다고 해서 미래에도 잘한다는 보장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를 말한 사람이 곧 이어 죄악에 머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원수보다는 친구에게서 더 많은 것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이 기대가 서로를 미워하는 관계가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서로 뭔가를 기대하고 만나는 관계가 아니라 은혜를 나누기 위해 만날 뿐입니다. 뭔가 베풀었다면 그 심령에 손길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한 결과임을 먼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행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십시오. 나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임을 날마다 되새기며 살아가십시오. 사실 조그만 일에서도 마음이 토라지고 분노하고 다투는 우리의 실체를 생각하면 부끄러울 수밖에 없지 않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참으로 크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2004년 한해가 시작됩니다. 올 한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날마다 그리스도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머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