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강) 삼상 25:23-31 아비가일의 신앙

<본문>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의 앞에 엎드려 그 얼굴을 땅에 대니라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가로되 내 주여 청컨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으로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의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여종이 내 주에게 가져온 이 예물로 내 주를 좇는 이 소년들에게 주게 하시고 주의 여종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때에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수하셨다든지 함을 인하여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신 때에 원컨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사무엘상 25:23-31)

<설교>

지난 시간에 원수인 사울은 살려준 다윗이 요구한 것을 주지 않고 다윗을 무시하는 나발에 대해서는 복수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신앙은 실력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사울을 살려준 것이 다윗의 실력이었다면 나발에 대해서도 같은 행동이 나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제의 신앙이 오늘 여러분에게 승리하게 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과거의 신앙을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항상 현재를 돌아보면서 과거에 나를 다스리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다스리심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안다고 해도 그것은 여러분의 실력이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알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한 덕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아갈 수록 자신은 철저히 부인되어져 갈 뿐입니다. 신자란 자신을 드러내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고 내속에서 나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를 드러내 보여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드러낼 그릇이며 도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수시로 잊어버리고 삽니다. 설교를 듣고 배운 바대로 살아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고, 몰라서도 아닙니다. 설교를 들을 때는 ‘맞다’고 하면서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아야지’하면서 단단히 결심을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막상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면 내 이익을 추구하는 본성이 앞서게 되고 손해보지 않으려는 탐욕만이 앞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본문에 등장하는 아비가일은 귀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바칠 많은 것을 준비하여 다윗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다윗을 만나자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의 앞에 엎드려 그 얼굴을 땅에 대는 태도를 취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낮추는 반면 상대를 높이는 태도입니다. 아비가일이 다윗 앞에서 이러한 태도를 취한 것은 단순히 남편인 나발을 살리기 위해서, 즉 다윗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취한 가식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의 왕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에 대한 태도가 나발과 아비가일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발은 다윗을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의 왕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왕인 사울을 배반하고 도망쳐 다니는 반역자로 여겼습니다. 때문에 다윗의 요구를 묵살해 버린 것이고, 그런 다윗이 자신의 담이 되어서 소유가 지켜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을 힘있는 자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비가일은 다윗의 현재의 모습을 보고 그를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모습이 어떻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하나님은 다윗에게 함께 하고 계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을 무시하고 분노케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것은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하는 말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25절에서 아비가일은 남편 나발을 불량한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어리석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나발이라는 이름에 맞게 행동할 뿐이라고 하면서 나발을 무시하고 있는 듯한 말을 합니다. 이 역시 나발을 낮추고 욕함으로서 상대적으로 다윗의 분노를 풀어 보겠다는 의도로 하는 말로 이해하기 보다는 진심으로 나발을 어리석은 자로 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아비가일이 나발을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은 아비가일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함께하고 계시는 다윗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나발이 다윗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보지 못한 것 자체를 어리석고 미련한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불량하다는 것 또한 행실이 나쁘다는 표현이기보다는 하나님이 택한 자를 무시하는 행위 자체를 불량한 것으로 여기는 말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다윗에 대한 아비가일의 견해가 어떤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26절을 보면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 역시도 아비가일이 철저히 다윗을 기준으로 하여 모든 판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그래도 그렇지 아비가일이 나발의 아내인데 어떻게 나발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마치 부부의 정이라고는 전혀 없는 듯한 모습을 아비가일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비가일이 나발을 사랑하였다면 나발에 대해 변명을 해주면서 어쨌든 나발을 용서해달라는 말을 하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비가일은 나발을 무시하고, 나발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을 보면서 아비가일에 대한 의문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아비가일이 나발을 욕하고 결점을 드러내는 말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다윗은 아비가일을 칭찬합니다. 다윗이 아비가일을 칭찬했다는 것은 하나님 역시 아비가일의 행동을 기쁘게 여기셨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볼 때 아비가일이 과연 칭찬을 들을 만한 말과 행동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아비가일의 말과 행동을 칭찬 받을만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면, 결국 아내들이 여기저기서 남편의 결점을 드러내고 험담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까?

이러한 의문은 성경이 기록된 목적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이해할 때 해소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아내가 남편의 허물을 감싸주고 그냥 넘어가는 부부의 정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것에 있습니다. 즉 나발과 아비가일을 통해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인가를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편에 대한 아비가일의 태도에 대해 의아심을 가지기 보다는 하나님이 결국 나발을 치시고 아비가일이 칭찬을 받고 다윗의 아내가 되는 일을 통해서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인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나발이 다윗의 분노를 사고 결국 하나님이 치심으로 죽게 되는 것은, 다윗이 함께 함으로써 자신의 소유가 보존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은 것에 있습니다. 나발은 자신의 힘을 믿었고 다윗 없이도 자신의 힘으로 얼마든지 스스로를 유지하고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함께 해준 것을 이유 삼아 뭔가를 요구하는 것을 무시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아비가일은 다윗을 인정합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았기에 다윗이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힘이며 하나님의 지키심 아래 거하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나발을 이름 그대로 어리석은 자로 말하는 것이고, 다윗을 무시하는 것을 하나님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불량한 행위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비가일이 비록 나발을 불량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말하였지만, 나발을 철저히 무시하면서 그의 결점만 드러내고 죽어도 싸다는 식으로 대한 것이 아닙니다. 28절을 보면 “주의 여종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말을 합니다.

사실 아비가일에게는 다윗에 대한 허물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비가일은 다윗이 소년들을 나발에게 보내었을 때 그것을 보지 못하고 나발이 다윗을 무시하게 된 것을 자신의 허물로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발에게 충고하여 그런 일이 없게 하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발의 불량한 행위와 어리석음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아비가일의 모습입니다.

우린 이러한 아비가일의 모습에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여 사는 것이 어떤 것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결점과 허물을 드러내는 일에는 부지런 하지만 다른 사람의 어리석음과 신앙 없음이 내 탓이라는 생각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고 복음을 안다고 할 때,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지적하고 잘못됨을 드러내는 것은 하면서도 그 사람의 잘못됨이 바르게 알고 있는 내가 그에게 가르치지 못하고 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생각에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하나님의 긍휼을 제대로 아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결점과 허물을 드러내고 책망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형제의 미련함과 어리석음이 나 때문으로 여기면서 내게 허물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까? 진심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나발과 아비가일은 운명은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38절에 보면 하나님은 나발을 쳐서 죽게 합니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나발이 죽은 뒤에 다윗의 아내가 됩니다. 윤리적으로 본다면 남편이 죽은 뒤에 곧 바로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될 수 있는가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하지만, 성경은 윤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닌 이상 세상의 윤리적 시각은 버리는 것이 옳습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의 아내가 되는 것은 과연 어떤 사람이 다윗과 함께 할 수 있는가를 가르치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윗은 남편이 죽은 여인을 자기 아내로 삼아 버리는 모습으로만 비춰질 것입니다.

나발은 다윗을 다윗의 현재 처지만을 바라보면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함께 하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다윗을 평가했습니다. 그 결과 다윗에 대해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게 된 것입니다.

29절에 보면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는 말을 합니다. 싸개라는 것은 값진 물건이나 금은보화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싸개에 잘 싸서 묶어 두었던 고대의 풍습에 따른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다윗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안전하게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뜻의 말입니다. 반면에 다윗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던져 버리신다는 말로서 다윗의 생명과 원수들의 생명을 대조함으로써 다윗은 하나님에 의해 승리하게 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다윗에게 함께 하심을 알았고 다윗이 하나님에 의해 그 생명이 보존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다윗을 선대하는 것이 곧 다윗과 함께 하는 것이고 다윗과 함께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복에 거하는 것임을 아비가일이 알았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이 볼 때 다윗의 가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나발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생각하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다윗의 초라한 처지만을 봤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나발을 쳐서 죽이시고 아비가일은 칭찬을 듣고 다윗의 아내가 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나발이 아니라 아비가일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택하시고 예수님과 함께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선대하는 그가 곧 하나님으로부터 기뻐함을 입을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누구든 ‘나는 예수님을 선대하고 높인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예수님의 초라한 모습과 세상에서의 약자로서의 삶까지 선대하고 높이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니면 예수님 덕분에 내가 잘 될 것을 바라보고 예수를 찾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나발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신자는 약자를 바라보는 시각 역시 달라져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초라한 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극히 현실적인 판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신자를 대할 때는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시각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자신을 절대로 강자로 여기지 마십시오. 물론 스스로 생각할 때 자신을 강자로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판단은 항상 상대적입니다. 나보다 덜 가지고 부족하게 보인 사람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강자 행세를 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여호와께서 주신 것임을 인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약자가 내 앞에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세워서 나를 가르치시고 책망하신다는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바른 신앙의 길을 갈 수 있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되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