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강) 삼상 25:32-35 다윗의 찬송

<본문>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급히 와서 나를 영접지 아니하였더면 밝는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 두지 아니하였으리라 다윗이 그가 가져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고 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평안히 올라가라 내가 네 말을 듣고 네 청을 허락하노라(사무엘상 25:32-35)

<설교>

우리는 신앙을 말하면서도 신앙의 참된 본질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항상 이점에 대해 애타하면서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놓치고 있으면서도 마치 신앙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야 말로 스스로에게 속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내 자신에 대해 속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눈치 챈다는 것이 무척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항상 자기편에 서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자신에 대해 무지하기 마련이고 자기의 오류와 잘못됨을 발견하기가 매우 힘든 것입니다. 이것을 돕기 위해 내 곁에 누군가를 보내시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오래 하셨거나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더욱 크게 요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년 수나 교회에서의 위치로 인해 자신에 대한 큰 착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절에 보면 다윗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찬송은 곡조와 가사가 있는 노래를 부르는 식의 찬송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하신 일에 대한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찬송가를 불렀다고 해서 여호와를 찬송했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입니다. 찬송의 중심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무슨 일로 인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까? 먼저 지난 주일의 설교 내용은 나발을 치려는 다윗을 찾아가는 아비가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불량한 나발을 개의치 말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으로 다윗이 나발에게 친히 복수하는 일을 막으셨다는 말을 합니다(26절). 이러한 아비가일의 말로 인해서 다윗은 나발에게 친히 복수하는 것의 잘못됨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가일을 보내셔서 자신의 잘못됨을 막으시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우리는 다윗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해 주는 것과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 자로 살아가는 것의 차이가 명백함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께 ‘여러분의 배후에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여러분의 삶을 인도하고 계심을 믿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모두 다 ‘예’라고 답할 것입니다. 적어도 여러분 스스로에 대해서는 그렇게 인정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살아계신 자로 살아가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답하기를 주저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는 자신이 있어 하면서도 삶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삶에 대해 자신만만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언제나 내가 믿는 말씀과는 전혀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인간은 연약하니까?’ ‘인간은 죄인이니까?’라는 말로서 현재의 잘못된 모습을 정당화 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죄인이라는 신자의 고백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죄인이라 하면서 죄인의 모습이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용어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만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죄인이 아닙니다.

진정한 죄인의 모습은 삶에서 분명히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죄인의 모습은 두드러집니다. 사람을 대하는 것에서 그가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지 아니면 단지 입술의 죄인일 뿐인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수준 높은 윤리적인 삶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믿음으로 인하여 뭔가 달라지는 모습이 보여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의 자연적 결과로 보여지는 열매인 것이지 신자가 목표로 삼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신자의 삶의 목표는 하나도 둘도 셋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연약하다는 것으로 현재의 잘못을 정당화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말로서 자기의 잘못된 것에 대해 지적 받기를 회피하려고 하지 마시고 방패로 삼지도 마십시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 죄인된 자로 나오기를 거부하는 몸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죄인이라는 고백을 하면서도 죄인이기를 거부하는 양면성을 보일 뿐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자신이 없다면 그 사람은 누구의 삶에 대해서도 판단할 권한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일부 조금 나은 것을 가지고 그를 판단할 수도 정죄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는 것처럼 저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가 살게 하심을 생각하게 될 뿐입니다.

다윗은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실제 살아계신 자로 살았습니다. 그 모습을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찌로다”(32절)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비록 사울에게 쫓기는 처지이긴 하지만 하나님께 택함을 받고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반면에 아비가일은 선지자도 무엇도 아니고 단지 다윗이 치고자 하는 나발의 아내, 여인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비가일의 말은 그렇게 비중 있는 자의 말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아비가일의 말에서 자신이 나발을 치고자 하는 것의 잘못됨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다윗의 인격으로 봐야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으로 봐야 합니까? 분명 믿음입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을 하나님이 보내신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막으시기 위해 아비가일을 보내신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럴 때 아비가일의 말은 누구의 말이 되겠습니까? 아비가일을 세워서 다윗에게 전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아비가일을 아비가일로만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아비가일로 본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윗의 찬송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에게 육신의 좋은 것을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잘못을 알게 해주고 잘못된 행위를 막은 아비가일로 인해서 찬송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이러한 찬송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군가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신앙을 깨닫게 된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사람을 보내주신 하나님을 감사하며 찬송한 적이 있습니까? 분명 이것은 참되고 귀한 신앙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신앙에는 그다지 마음을 두지 않고 사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이래야 교회 일에 열심이고 전도하고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 등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시각이 다윗의 찬송을 이해함으로써 고쳐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살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자연히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 자리하게 됩니다. 마치 다른 사람은 모두 행복하게 잘사는데 나만 열악한 환경과 조건에서 고생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 불평하게 됩니다.

그런데 TV에서나 주변에서 자신보다 더 열악하고 고통스러운 환경과 형편에서 사는 분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것을 보면서 저들에 비하면 자신은 큰 복을 누리고 있고 은혜를 받은 것인데 감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원망하려고 했던 잘못됨에 대해 발견했다면 결국 그들로 인해서 하나님을 원망할 뻔한 잘못됨이 막아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때 하나님께서 저들을 내게 보내시어 나의 원망을 막으셨다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신앙이 이처럼 우리의 삶의 깊숙한 곳까지 바라보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겉만 보고 판단하는 신앙이기 때문에 겨우 종교적 행위 몇 가지를 가지고 신앙인 행세를 하는 사이비 신자와 같은 모습에서 맴돌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결코 여러분을 폄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의 깊은 곳 중심에 머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것을 말로 때우는 것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배울 수 있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들을 수 있는 신앙인으로 되어지기 위해 더욱 더 깊이 하나님을 바라보자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만난 사람을 누구로 바라보십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만난 사람은 모두 우연일 뿐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구분되어질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일하고 계심을 생각한다면 내가 누구를 만나든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입니다. 나보다 못한 자를 보내셔서 나의 교만을 드러내기도 하시고, 나보다 잘난 자를 보내셔서 평소 믿음을 말했지만 역시 세상 것을 기준으로 하여 사람을 평가하는 습성을 고발하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때로는 나의 악함과 잘못됨을 막으시기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불신자든 신자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으며, 나를 고치시고 깨닫게 하시기 위해 그들을 내 앞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 누군가로 인해서 자신의 잘못됨을 깨닫게 되었다면 그 사람을 보내주신 하나님을 찬송하십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믿음에 있게 하기 위해 그를 보내셨음을 생각하시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십시오. 다윗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설교를 듣는 자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자신의 잘못과 허물과 믿음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면 목사를 세우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자의 참된 자세입니다.

그러나 만약 자신의 잘못됨을 드러내는 말이라고 해서 그에게 오히려 분노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않는 것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사람은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6:26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잠 27:21절에는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는 말씀을 하기도 합니다. 칭찬은 분명 기분 좋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칭찬하면 화가 있다 하기도 하고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한다는 알 수 없는 말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칭찬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칭찬에는 사랑과 진심이 결여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사람을 좋게 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나를 해롭게 하는 것임을 알아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자신의 유익을 생각한다면 칭찬의 말을 듣기보다는 자신의 잘못과 허물에 대해 언급해 줄 수 있는 진정한 형제를 원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앞에 어떤 사람이 있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주는 사람입니까? 잘못된게 있어도 그냥 눈감아주고 모른 척 넘어가는 것이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으로 여기십니까? 과연 그런 역할을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서로 만나게 하셨을까요? 물론 잘못에 대해 지적하고 책망하고 판단하는 분위기를 만들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허물을 자신에게 돌리는 아비가일의 자세로 형제에게 다가가고 아비가일을 보내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다윗의 믿음으로 형제를 바라보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형제의 관계이며 사랑의 관계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야 말로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신자의 겸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신자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것은 지식일 뿐이지만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삶 자체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예수님에 대해 멋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이 없는 삶이라면 그는 예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깊이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아비가일을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다윗의 그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묵상하시고 우리 다같이 다윗의 마음에 서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만나는 형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형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에 드는 형제이기 때문에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나의 잘못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형제로 인해 찬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