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강) 삼상 2:22-26 부모와 자녀

하나님은 엘리의 아들들을 불량자로 말합니다. 불량자인 그들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을 자기들 멋대로 취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의 행동이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보지 아니하고 제사장이라는 자신들의 위치만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제사장이라는 권세를 휘두르는 것이었습니다. 전능자이신 하나님이 그들 위에 계신다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단지 ‘나는 제사장이다’는 것만 내세우면서 권세를 누렸던 것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자신의 죄인됨을 알지 못했습니다. 비록 자신들이 제사장 가문에 속한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은 죄인임을 알았다면 제사장이라는 직책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제사장이라는 것을 권세 삼아서 제물을 마음껏 취하는 행동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죄인임을 생각하지 않은 채 제사를 드린다면 그것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자신도 역시 죄인임을 잊어버린 채 목사라는 직책의 권세만 누리려고 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마음으로 예배에 참여한다면 그것이 곧 예배를 멸시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어떤 사람에게도 다른 사람을 지배할 권세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각기 다른 역할을 맡기셨을 뿐입니다. 즉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맡은 역할인 것이지 한 국가를 지배할 권세로 주어진 것이 아니란 얘기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역할을 힘으로 여겨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 계신 참된 권세자를 보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을 알지 아니한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도 주어진 역할을 힘과 권세로 삼는 자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알지 아니한 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목사라 할지라도 목사란 직책을 힘과 권세로 누리려고 한다면 그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을 알지 아니한 자일뿐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권세를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점을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분명히 말씀 드렸듯이 세상에 특별한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만 존재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고 그분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인식하는 신자라면 이러한 내용들을 깊이 깨닫고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불량자라 불려지는 엘리의 아들들에 대한 엘리의 반응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살펴보면서 부모와 자식과의 바른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식을 기르는 부모라면 자식을 기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감할 것입니다. 이것은 자식을 낳아서 길러보지 아니한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자식을 기르기가 어렵다는 것이 육체적으로 피곤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있는 사람이라면 사람을 고용해서 자식 기르는 것을 맡길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육체적인 피곤을 느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기르기가 어려운 것은 자식이 커갈수록 부모에게서 독립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즉 커갈수록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들의 뜻대로 하려고 하게 됩니다. 때문에 자식에 대한 어려움은 자식이 부모 마음대로 안된다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라고 말합니다. 엘리가 늙었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엘리가 늙었다는 것은 반대로 엘리의 아들들이 더욱 장성했다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엘리는 아버지로서의 권위가 떨어지고 반대로 엘리의 아들들은 자신들의 주장과 고집으로 살아갈 위치에 도달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가정교육이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인격적인 면에서 생각해 본다면 가정교육이 영향을 크게 미칠 수도 있습니다. 가정의 분위기가 자식들의 성격에 영향을 주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인격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면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즉 신앙은 가정교육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이 말의 뜻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저는 신앙을 위해서 교육을 시키지 말라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가정이라면 하나님을 믿는 부모라면 자식을 하나님의 자녀로 기르는데 모든 힘을 다 쏟아 부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신앙으로 살아가고 구원을 얻는 것은 가정교육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25절에 보면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고 말합니다.

엘리는 아들들의 행실을 나무랐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들은 엘리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다면 ‘엘리가 가정교육만 잘했다면 그 아들들이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엘리가 자식을 어떻게 양육했는가에 대해서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신앙을 위한 가정교육은 필요 없다는 의미로 하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가정교육을 잘하고 못함이 자식의 구원과 연관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가정 교육이 구원에 연관된다면 신앙의 부모를 두지 못한 사람은 구원에 지장이 있다는 얘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자된 자가 자녀를 기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도록 교육한다는 의미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밥먹을 때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밥먹을 때 손을 모으는 것은 사실 하나님을 알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엄마에 의한 반복적인 교육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들은 그것을 보면서 대견스럽게 여깁니다. 마치 자신의 아이가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오해하는 것입니다. 내 아이는 신앙에 있어서 어릴 적부터 이렇게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는 것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제사를 드리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즉 그들이 예배에 아예 참석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교회는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 멋대로 행동했던 것입니다. 엘리가 아들의 행동에 대해서 나무랐을 때 그들은 아버지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그것은 엘리가 말하는 하나님 자체를 무시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호와께 범죄한다는 것 자체를 우습게 여긴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잘못을 하면 하나님이 벌준다’는 얘기가 먹혀 들어갑니다. 그러나 커갈수록 부모의 그런 말들이 그냥 하는 소리라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고 또 부모를 보면서 배우기도 합니다. 죄를 지어도 아무 일이 없음이 반복될 때 아이들에게는 ‘하나님은 없다’라는 인식이 점차 심어져 가는 것입니다. 부모가 말하는 하나님은 그냥 말에만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부모의 삶을 보면서 확인하기도 합니다. 부모가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세상을 포기하기보다는 오히려 세상 것을 위해서 순간순간 하나님을 포기하는 것을 볼 때 그것을 더욱 더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내 부모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의 가정에 자녀를 주신 것은 그 자녀를 신앙으로 잘 교육시켜서 구원시키라는 의도가 결코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 소관입니다. 하나님이 죽이기로 한 자는 죽을 것이고 살리기로 한 자는 살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신앙교육을 잘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는 구원과 연관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교육이란 지식을 가진 자가 상대적으로 지식이 없거나 부족한 자를 가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자녀 교육이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아는 부모가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는 자식을 가르친다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의 자녀 교육의 잘못됨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모는 무조건 자식보다 신앙적인 면에서 우위에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게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된 부모들이 자녀에게 요구하는 것은 ‘교회만 잘 다녀라’는 것입니다. 자신들부터 교회를 잘 다니는 것을 신앙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자녀에 대해서도 교회를 잘 다녀 줄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교회만 나가면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부모 역시 교회에 잘 다니는 모습을 자녀에게 보여주는 것이 신앙교육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물론 교회를 다니고 기도하고 봉사하는 행동을 본다면 부모들이 자녀들보다 훨씬 우위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를 부모부터 모른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려고 하기보다는 다만 교회에 다니면 되는 것으로 가르쳐 버리는 것입니다.

23-24절을 보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엘리가 자식들의 행실에 대해서 듣고 나무라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 21:18-21절에 보면 부모의 훈계를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방탕한 자식은 부모가 그 자식을 잡아다가 장로들에게 데려가서 자식을 고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면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 자식을 돌로 쳐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죄지은 자식을 벌준다는 차원의 법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운 분인가를 알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즉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단호한 하나님을 보여주는 율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는 자식의 행위에 대해서 다만 말리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자식을 더 위하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부모가 율법대로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고 무시할 때 장로들에게 내어 주어 죽게 하겠습니까? 만약 이스라엘이 그 법대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곧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죄지은 자녀에 대해 관대함으로 넘어간다면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엘리의 모습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누구나 자식을 사랑합니다. 물론 어떤 이는 부부싸움을 하고 홧김에 자식을 죽이기도 하고, 돈 때문에 자식을 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지만 모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자식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초월해 버리는 것입니다.

‘자식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자식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게 되는 것이 부모라는 말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양보는 신앙적인 면에까지 퍼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자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식 편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린대로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다는 부모의 강한 모습을 자녀에게 보여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식을 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다는 것은 엘리의 교육과 상관없이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죽을 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죽을 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자임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엘리의 아들들은 아버지로부터 신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하나님에 의해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은총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자식교육 제대로 시켜라는 것을 권면하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시켰다고 해서 하나님이 죽이기로 뜻한 자가 살아나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부모와 자식을 만나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자식은 하나님이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식을 신앙으로 교육시킨다고 해서 하나님이 죽이기로 뜻한 자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자식에 대해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여기서 부모된 자가 잊고 있는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는 자식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식을 통해서 자신을 확인해야 하는 것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교육은 아는 자가 모르는 자를 가르침으로써 그 지식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의 자녀교육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녀를 통해서 부모가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엘리는 아들들의 잘못됨을 나무라는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아들들을 보면서 아들에 대해 탄식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아들들의 그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임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바로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복종치 아니하고 살았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가정에 자녀를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부모의 말을 듣지 않은 자식은 부모에게는 큰 근심거리이며 탄식거리입니다. 그럴 때 그러한 자식을 주신 하나님께 원망할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바로 하나님에게 그러한 자식으로 살았음을 깨닫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속썩이는 자식 때문에 괴로워하는 자신의 심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나 좋은대로 살아가는 나를 보면서 괴로워하시고 탄식하실 하나님을 발견하라고 그러한 자식을 보내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보여줄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신앙으로 잘 가르쳐서 천국 보내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내 역할은 예수를 전하고 증거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자식을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은 부모를 떠나서 제사장 엘리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아버지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즉 정상적인 신앙의 가정에서 부모의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았던 것입니다. 즉 사람의 교육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교육을 받아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신앙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식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부모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보여주는 역할에 충실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자식에게 전달하면 됩니다. 자식이 부모의 가르침을 무시할 때 자식만 나무랄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자로 살았으며 그러한 자신에 대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탄식하셨을까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할 때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라면 바로 그러한 부모에게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식을 기르면서,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불신앙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독생자까지 버리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그 사랑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나에 대해 얼마나 탄식하실까를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그처럼 하나님을 깊이깊이 생각할 때 그것으로 자연히 자식에게 하나님을 가르치고 예수님을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말을 하지 않더라도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시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잘못을 했을 때 나무라고 야단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자식의 잘못된 행동을 나무라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이 어떠했던가를 살피고 자신을 먼저 나무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신앙하는 참된 부모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