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강) 삼상 25:36-42 아비가일의 재혼

<본문>

아비가일이 나발에게로 돌아오니 그가 왕의 잔치 같은 잔치를 그 집에 배설하고 대취하여 마음에 기뻐하므로 아비가일이 밝는 아침까지는 다소간 말하지 아니하다가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가 깬 후에 그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고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다윗이 나발의 죽었다 함을 듣고 가로되 나발에게 당한 나의 욕을 신설하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 머리에 돌리셨도다 하니라 다윗이 아비가일로 자기 아내를 삼으려고 보내어 그에게 말하게 하매 다윗의 사환들이 갈멜에 가서 아비가일에게 이르러 그에게 일러 가로되 다윗이 당신을 아내로 삼고자 하여 우리를 당신께 보내더이다 그가 일어나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가로되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사환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하고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사자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사무엘상 25:36-42)

<설교>

본문은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이 하나님에 의해 죽자 다윗이 아비가일을 아내로 삼는 내용입니다. 이런 내용을 대할 때 이해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 구축되어 있는 윤리와 도덕입니다. 윤리와 도덕은 다윗이나 아비가일과 같은 행위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남녀 문제에 대해서는 무척 엄격했던 문화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이성의 문제에 대해 개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청년들은 제외한다 할지라도 소위 장년 계층의 사람들은 본문의 내용에 대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라는 의문만 남을 것입니다.

물론 남편이 죽은 여자가 다른 남자와 재혼하는 것에 대해서는 현대의 윤리와 도덕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아비가일이 남편 나발이 죽자마자 다윗과 재혼을 한 것에 대해서는 분명 부도덕하다는 비판을 가할 것입니다.

또한 39절에 보면 다윗이 나발의 죽었다 함을 듣고 여호와를 찬송한 뒤 아비가일을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사환을 보냅니다. 이 역시 남편이 죽자마자 그 부인을 아내로 삼기 위해 사환을 보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비난을 받아 마땅한 행동으로 여깁니다.

그러면서도 섣불리 다윗을 비난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이나 아비가일의 행동에 대해 하나님이 가만히 계신다는 것 때문이고, 어쨌든 다윗은 성경에서 위대한 인물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윤리와 도덕으로는 용납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냥 묵과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만약 악한 사람이 그러한 일을 행했다면 주저 없이 그 행위에 대해 비판을 가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행위라는 것 때문에 ‘무슨 이유가 있겠지?’하고 지나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차마 다윗의 행위를 옳은 것으로 말하지는 못합니다. 아비가일의 행위 역시 옳다는 말을 못합니다. 이처럼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으면서 동시에 옳다는 말도 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이것이 윤리와 도덕을 벗지 못하고 성경을 대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인 것입니다.

본문만이 아니라 성경은 윤리와 도덕의 옷을 벗지 못한 채 접근한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쌓아 놓은 윤리와 도덕의 옷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윤리와 도덕이 없이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악을 행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의 윤리와 도덕 말고 새로운 하늘의 윤리와 도덕으로 살아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내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먼저 남자에 대한 아비가일의 시각부터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생각할 것은 다윗과 나발에 대한 아비가일의 태도입니다.

먼저 아비가일은 다윗을 만났을 때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림으로써 경외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28-31절에서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한 말을 보면 다윗을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사람으로 보고 있으며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28절)라고 말할 만큼 다윗에 대해 신앙적인 신뢰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나발에 대해서는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25절)라고 말할 만큼 불신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윗과 남편인 나발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비가일이 남자를 바라보는 기준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아비가일은 남편인 나발의 편을 드는 것이 옳습니다. 설사 나발을 불량한 사람으로 욕한다 할지라도 이는 나발을 살리기 위해 다윗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가식이어야 옳습니다. 그것이 남편에 대한 아내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아비가일이 나발을 불량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것은 다윗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가식적인 말이 아니었습니다. 실제 나발을 불량하고 미련한 자로 봤던 것입니다. 반면에 다윗에 대해서는 철저한 신뢰를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아비가일은 나발보다 다윗을 더 사랑하게 되어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아비가일이나 다윗은 비난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러한 내용이 아닙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용모나 외적인 조건 때문에 신뢰한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으로 인해서 다윗을 신뢰하였던 것입니다. 반면에 나발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다윗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재산을 믿고 다윗을 조롱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것이 아비가일에게는 불량하고 미련한 것으로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불량한 것이었고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비가일이 남자를 바라보는 시각이며 기준이었습니다.

즉 아비가일은 세상적인 조건과 권력이나 힘을 기준으로 남자를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준으로 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른 신앙의 남자가 누구인가를 보고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의지하고 함께 할 남자는 돈이 있고 힘이 있는 남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고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비가일의 입장에서 본문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비가일이라면 과연 누구를 택하겠습니까? 누가 과연 의지할 만한 남자이겠습니까?

여자는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여인은 약자로 불리는 것입니다. 남자에게 소속되어서 남자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의 인생에서 남자를 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비가일은 나발이 죽자 다윗을 택하게 됩니다. 당시 다윗은 왕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에게 쫓기고 있었기에 그 앞날이 어찌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런 남자를 택한다는 것은 아비가일의 앞날에 대한 불안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다윗과 결혼하여 다윗을 따르게 됩니다. 결국 아비가일은 다윗에게서 외적인 조건은 전혀 보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이 다윗에게 함께 하신다는 것만 봤던 것입니다. 그것만이 자신을 다윗에게 맡길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발을 죽이십니다. 나발이 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순히 다윗이 요구하는 것을 주지 않고 조롱한 행위 때문일까요? 그것보다 더 악한 것은 자신의 소유가 보존되고 지켜지는 것이 자신의 힘 때문인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자신의 것은 자기 스스로 지킬 수가 있다는 생각 때문에 25:7절에서 “네 게 양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상치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라고 전하라는 다윗의 말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신의 힘으로도 충분히 지킬 수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발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없어도 내 소유는 내 스스로 지킬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야 말로 완악하고 불량한 소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나발을 죽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가일은 하나님이 나발을 죽이심으로써 다윗과 결혼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불량하고 완악한 나발로부터 아비가일을 벗어나게 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다윗과 함께 살도록 조치하신 것이 본문의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아비가일의 남자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기준이 나발처럼 세상적이었다면 나발이 죽은 것에 대해 낙심하였을 것입니다. 의지하였던 남편이 죽었으니 낙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애당초 아비가일은 나발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나발과 함께하고는 있었지만 나발을 의지할 남편으로 여기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합니다. 때문에 나발이 죽자 다윗에게 자신을 맡기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아비가일이 세상적인 시각으로 다윗을 바라보았다면 결코 다윗과 결혼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 다윗의 조건은 고생을 암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비가일이 다윗과 결혼한 것은 자신이 의지할 남자를 무엇을 기준하여 바라보았는가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아비가일의 입장에서 본문을 대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볼 때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는 우리 자신들이 연약한 여자와 같은 자들로서 어떠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우리가 의지할 대상을 찾아야 할지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떠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십니까? 돈있고 권력만 있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보이십니까? 그것은 나발의 시각일 뿐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과연 예수님이 여러분이 의지할 분이십니까? 여러분의 모든 인생을 맡겨도 좋을 만큼 든든한 분으로 여기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아비가일이 다윗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만을 본 것처럼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만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그가 바로 예수님과 결혼한 신부가 아니겠습니까? 신자는 세상을 이런 시각에서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힘을 믿고 사는 세상이 불량하게 보이십니까?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보지 못하는 세상이 미련하게만 보이십니까? 그것이 신자에게 있어야 할 지혜입니다. 세상을 바로 보는 지혜가 있을 때 그리스도가 내게 어떤 분인가가 보여지는 것입니다. 이들이 진정으로 눈을 뜨고 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39절에 보면 다윗은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 머리에 돌리셨도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처럼 여호와께서는 세상의 악행을 그 머리에 돌리실 것입니다. 결국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사라질 대상이 불과할 뿐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거대한 골리앗과 같습니다. 그러나 골리앗은 연약하게만 보이는 믿음에 의해 무너집니다. 이 이치를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악행을 결국 그 머리에 돌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함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심판에서 자기 백성을 건지시기 위해 그리스도의 신부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을 다윗과 결혼하게 한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의 진정한 남편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의지할 대상으로 여기고 살아가십니까? 오직 그리스도이심을 다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린 세상과 함께 멸망할 대상에 지나지 않음을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진심으로 원하는지 여러분의 속마음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믿음을 조롱합니다. ‘믿어서 잘된 일이 무엇이냐?’고 하면서 믿음의 무가치함을 주장합니다. 그러한 말에 화낼 필요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조롱하라 하십시오. 그러나 신자는 나 잘되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십시오. 그럴 때 세상의 조롱은 더 이상 조롱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미련함을 보이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결국 이김은 내가 믿지 않는 자보다 더 잘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믿음 안에 거함으로 이기고자 하는 마음보다 세상과 똑같이 힘으로 이기고자 하는 불량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신랑으로 여기고 예수님을 따라가기를 원하기 보다는 세상을 향한 눈을 거두지를 못하는 미련함이 있습니다. 이런 우리이기에 아비가일을 세워서 우리를 교훈하시는 본문의 가르침은 참으로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돈으로 사는 것에 비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초라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악행을 그 머리에 돌리실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때가 되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에 우리는 아비가일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 다윗과 결혼하듯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만이 사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