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강) 삼상 26:1-12 누구의 생각으로 살 것인가?

<본문>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이르러 가로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사울이 일어나 십 황무지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과 함께 십 황무지로 내려가서 광야 앞 하길라 산 길가에 진치니라 다윗이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자기를 따라 황무지로 들어옴을 깨닫고 이에 탐정을 보내어 사울이 과연 이른 줄 알고 일어나 사울의 진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대 장관 아브넬의 유하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쳤더라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가로되 누가 나로 더불어 진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아비새가 가로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혔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깨든지 이를 보든지 알든지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이었더라(사무엘상 26:1-12)

<설교>

여러분은 자신을 생각할 때 ‘나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라고 여겨지십니까? 어쩌면 쉽게 답을 할 수 없는 물음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주변을 돌아볼 때 ‘나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듣고 ‘과연 저 사람이 예수를 따르는가 따르지 않는가?’를 분별하고자 한다면 대개 무엇을 기준하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무엇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는지의 여부를 판단하겠습니까? 어찌 생각하면 이 문제는 아주 애매하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시대처럼 예수님이 실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셔서 활동하셨던 공생에 시기에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분명 12제자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분명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생활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만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이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따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따른 것이라면, 예수님의 생각과 같은 생각으로 함께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동행이며 따름입니다. 아무리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고 했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생각이 다르고 예수님의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진심으로 예수님과 동행했던 시기는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고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뜻과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생각과 일치된 생각으로 살아갈 때 그것을 동행이라고 말하며, 제자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그리스도인은 항상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을 배우고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에 자신을 일치시키며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고 여겨지십니까?’라는 질문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과 같은 마음, 같은 생각으로 살아가십니까?’를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예수님을 따르는가에 대한 질문에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개는 ‘예수님을 따르는가?’의 여부를 교회에 대한 충성도나 착한 행동을 보고 판단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예수님을 따르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생각과는 전혀 동떨어진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교회에서 봉사하고 충성할 수 있으며 착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이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신자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각으로 살아가는가?’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어떤 마음과 어떤 생각으로 사셨는가를 살피고 배워서 같은 마음과 생각으로 살아갈 때 그를 가리켜서 예수님의 제자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을만한 일을 수없이 한다 할지라도 예수님과 다른 마음,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면 그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결국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죽으심을 만류하고, 결정적 순간에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예수를 부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서로 생각이 다른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다윗이고 한 사람은 아비새입니다. 1절에 보면 사울은 십 사람으로부터 다윗이 하길라 산에 숨었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다시 다윗을 잡기 위해 삼천을 군사를 거느리고 십 황무지로 내려가서 하길라 산 길가에 진을 칩니다.

이처럼 예전에 다윗이 굴에서 자신을 죽일 수도 있었는데 살려준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시 또 다윗을 죽이려고 애를 쓰는 사울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도 수시로 잊어버리는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사실 사울이 지금 살아있는 것은 다윗이 베푼 은혜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숨을 쉬면서도 그것이 다윗 덕분임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다윗을 치려고만 할 뿐입니다. 이것이 사울의 배은망덕이며 하나님에 대한 우리 자신들의 배은망덕한 모습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살려준 것은 다윗의 인품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사울을 죽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자신은 사울을 죽일 권리가 없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생각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다윗에 의해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다윗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야 하고, 다윗을 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원수 되는 것임을 깊이 생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에게는 이러한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살려준 다윗을 향해 울면서 ‘너는 남보다 의롭다’는 말까지 하였으나 그때 다윗에 대한 그 마음에 머물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 또 다시 다윗을 치기 위해 군사를 끌고 온 것입니다.

6절에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가로되 누가 나로 더불어 진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아비새가 가로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는 구절을 보면 무슨 이유인지 다윗이 사울의 진으로 가서 사울을 만나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누가 자신과 동행할 것인가를 아비새에게 묻고 결국 아비새가 동행할 것을 자원함으로 아비새와 함께 사울의 진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아비새와 함께 사울의 진으로 갔을 때 사울과 그의 군사들은 누워 자고 있었습니다. 엔게디 굴에서처럼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비새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8절)라는 말을 합니다. 24장에서 굴에 사울이 들어 왔을 때 다윗의 사람들이 다윗에게 하나님이 원수를 다윗의 손에 붙이셨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에 대해 예전과 같은 태도를 보입니다. 누구든지 사울을 죽인다면 그것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살아계신 이상 여호와께서 사울을 치실 것이니 사울이 죽을 날이 이르러 죽거나 아니면 전장에 들어가서 망할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9,10절). 그리고 사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을 가지고 그 자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의 생각이 옳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다윗의 생각이 옳지 않습니까?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비록 사울을 죽이고 싶었다 할지라도 다윗은 자기 생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비새는 달랐습니다. 아비새는 다윗과 함께 동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과는 다른 생각을 가졌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고 현재의 상황을 판단하였지만 아비새는 현재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한 것입니다. 즉 다윗이 사울을 찾아왔을 때 하필이면 사울과 그의 군사가 잠들어 있다는 것은 분명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다윗 편을 들고 계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사울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사울과 그의 군사들이 잠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이는 12절에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깨든지 이를 보든지 알든지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이었더라”는 구절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울과 그의 군사들이 모두 잠이 들고 그러한 상황에 다윗과 아비새가 사울에게 오게 된 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상황임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과연 하나님은 왜 이러한 일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까? 아비새의 말대로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을 죽이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그렇다면 다윗이 사울을 살려준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한 것입니까?

우리는 어떤 일의 상황이 나에게 유리하게 되어지면 하나님이 내 편을 들고 있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불리하게 되어지면 내 편이 아니라는 의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아비새의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의 아비새의 모습에게서 우리의 잘못됨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사울의 입장에서 하나님에 대해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아비새의 모습에서 생각할 수 있는 잘못됨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각에 자신의 생각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에 하나님을 끌어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러한 잘못을 행하는 경우가 많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새벽예배 본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며 우리를 교육하시기를 땅의 짐승에게 하심보다 더하게 하시며 우리에게 지혜 주시기를 공중의 새에게 주심보다 더하시는 이가 어디 계신가 말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구나”(욥 35:10-11).

이 구절은 욥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엘리후의 말입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해 의문을 가졌습니다. 자신은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세 친구가 죄가 있기 때문에 그런 재앙을 받는 것이라고 몰아붙이긴 하였으나 욥은 자신의 고통이 죄의 결과라고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욥에 대해 엘리후가 말했던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대해 이해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은 우리를 교육하시고 지혜 주시기 위해 일하시는 분임을 말합니다. 그런데 누구도 그런 하나님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욥과 그의 친구들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을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지혜를 얻어야 하는 존재임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자신의 고난이 자신을 교육하고 지혜를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에 대해 무지함을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단지 주어진 상황에서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에만 마음을 두었던 것입니다. 결국 잘못된 행동을 한 것도 없는데 엄청난 재앙을 주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어진 상황의 좋고 나쁨을 따라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의심하게 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비새의 눈에 다윗이 어떻게 비춰졌겠습니까? 아비새의 생각이 다윗처럼 바뀌지 않는다면 다윗의 행위는 참으로 어리석은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좋은 기회를 놓치는 바보 같은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아비새가 생각하는 지혜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지 말고 사울을 죽임으로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고난의 삶을 그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분명 아비새나 우리의 생각에는 이것이 가장 유리한 길로 보일 것입니다.

아비새가 다윗과 함께 하긴 했지만 다윗의 생각과 같은 생각을 갖지 못한 것처럼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예수님과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아비새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만 하나님을 생각하는 좁은 소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예수님이 어떤 생각으로 사셨는가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을 배우고 그 생각으로 살려고 하기 보다는 내 생각에 예수님을 맞추려는 시도를 멈추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바른 신앙을 기대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제 사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창과 물병만을 가지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다윗이 가지고 간 창과 물병은 사울의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창과 물병이 귀하다는 것이 아니라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을 가져갔다는 것은 다윗이 얼마든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창과 물병은 사울에게 목숨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아비새의 의견대로 사울을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엔게디 굴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울은 다윗이 가져간 창과 물병을 볼 때 자신은 죽은 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임을 알고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에게서 목숨을 가져가실 수도 있는데 다만 창과 물병만을 취함으로써 지금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임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게 되고 결국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사울과 그의 군사들이 잠들게 함으로써 다윗의 생각과 아비새의 생각의 서로 다름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 옳은가를 묻습니다. 여러분, 어떤 생각으로 사는 것이 옳습니까? 우리에게는 오직 그리스도의 생각만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사셨던 그 생각으로 이 땅을 사는 것이 신자입니다.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는 다윗의 생각이 곧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생각으로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