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강) 삼상 26:17-25 신앙이란 무엇인가?

<본문>

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알아 듣고 가로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음성이냐 다윗이 가로되 내 주 왕이여 내 음성이니이다 또 가로되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 청컨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인자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날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붙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그런즉 청컨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 곳에서 이제 나의 피로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중히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다윗이 대답하여 가로되 왕은 창을 보소서 한 소년을 보내어 가져가게 하소서 여호와께서 각 사람에게 그 의와 신실을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내 손에 붙이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오늘날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사무엘상 26:17-25)

<설교>

진리를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서로 다른 이야기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진리를 안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니고 참된 것을 안다고 해서 참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란 얘기입니다. 이점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부분입니다. 내가 말하고 있고 고백하고 있고 알고 있는 그 길을 가기 위해 얼마나 힘쓰고 있는가를 스스로 돌아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진리의 길을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된 것임을 알았고 이 길을 가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을 고백한다면 누가 뭐래도 그 길을 가기를 힘쓰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말은 맞고 참되는데 정작 자신의 삶은 그 길과는 어긋난 길에 머물러 있다면 결국 자기 스스로 자신의 말을 뒤엎는 것에 지나지 않지 않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볼 때 사울은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 죽이기를 포기하지 않고 또 다시 군사 삼천을 거느리고 다윗이 숨어있는 곳을 찾아 내려가지만, 사실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여 세웠고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음을 사울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도 잘못임을 알고 있고, 더군다나 다윗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살려준 은혜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자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다윗을 죽일 수 없음을 알았어야 했고 다윗 죽이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잘못됨을 회개하는 것이 마땅하며 이것이 바로 지혜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사울은 다윗 죽이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울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입니다. 즉 사울의 어리석음은 ‘모른다’거나 ‘무지하다’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따르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그대로 순종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자신이 치는 것은 옳지 않음을 알았고 그에 순종하여 사울을 죽이지 않고 살려주는 것이야 말로 다윗의 지혜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란 손해를 보지 않고 유익을 얻어낼 수 있는 어떤 방법을 생각해 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지혜로운 자로 사십니까? 아니면 어리석은 자로 사십니까? 자신을 두고 깊이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19절을 보면 다윗은 사울에게 “청컨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인자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날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붙지 못하게 함이니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다윗의 말을 보면 사울을 격동시켜 자신을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 받으시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이 사울을 시켜서 자신을 해하려 하시는 것이라면 기꺼이 여호와께 바쳐지는 제물이 되어 죽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전적으로 순종하겠다고 나서는 다윗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진실함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에게는 ‘왜 이렇게 하십니까?’라는 의심이나 원망이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만을 신앙하는데도 불구하고 괴로움과 어려움이 그치지 않는다면 ‘왜 이렇게 하시는가?’라는 의문과 의심이 발생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자신의 유익을 전혀 연결시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신앙입니다.

이러한 다윗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 우리의 신앙의 잘못됨과 문제가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신앙과 개인의 유익을 연관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 신앙적인 행위를 하는 것 등의 결과가 개인의 유익으로 나타날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결국 기대가 무너지고 뜻하지 않는 어려움과 문제가 발생할 때 신앙까지 흔들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사울을 격동시켜 자신을 해하려 하시는 것이라면 여호와의 제물이 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자신이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전폭적으로 순종하는 것이야 말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 또한 하나님에 대해 이러한 순종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기에 십자가에서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다윗도 알고 예수님도 압니다. 그분들이 하나님에 대한 어떤 신앙과 모습을 보이셨는가를 압니다. 그분들만이 아니라 선지자들 사도들의 일을 압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힘을 쓰고 그 일을 위해 자신의 한 몸 죽는 것을 개의치 않는 그분들의 삶을 보면서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하나님을 찾고 있는가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았던 다윗이나 예수님을 알았던 사도들 모두는 다만 순종하였을 뿐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생명이 요구되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순종한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순전한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너무 계산적이라고 할 수 있고, 겉모습은 번지레 하지만 생명이 없는 상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요? 혹시 신앙을 자신의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기 때문은 아닐까요?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보다는 세상을 향한 욕심과 소망이 강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사실 신자라 하지만 세상을 향한 욕망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향한 욕망을 가득 안은 채 ‘하나님을 믿노라’고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세상을 향한 욕망이 나를 망하는 길로 이끌어 가는 악의 세력임을 안다면 그러한 욕망이 있는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놓고 더욱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세상을 벗어나서 하나님 나라에 거하기를 소원하는 신자의 심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뭡니까? 천국을 말하면서 마음은 세상을 향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마음 상태에 대해 전혀 염려하지도 않고 고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말은 있으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죽으라시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을 사람입니다. 이러한 신앙이기에 자신에게 있는 어려움이나 고통을 두고 하나님을 원망치 않은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만 있을 뿐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을 사모해야 합니다. 현재 우리의 잘못됨과 문제가 무엇인가를 깊이 파악하고 순전한 신앙의 길을 사모하고 그 길을 가기를 기도하고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로서 정당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살기를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진리라고 하면서 예수님처럼 순종하기를 꺼려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윗에게는 자기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있다면 하나님일 뿐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신앙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신앙이 주어지기를 원하십니까?

다윗에 비해 사울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질 손해에 민감했던 것입니다. 다윗에 대한 경쟁의 마음에서 비롯된 시기와 미움에서 벗어나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기와 미움을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다윗에 대해 잘못 행하고 있음을 모른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엔게디 굴에서 자신을 살려주었을 때도 자신보다 다윗이 더 의롭다는 고백을 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행위가 옳지 못하고 의롭지 못함을 알면서도 다윗을 죽이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시기와 미움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과는 달리 행하는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중히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라는 말을 합니다.

사울은 다윗이 또 다시 자신을 살려주었음을 알고 다윗에게 잘못을 고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해하지 않을 테니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사울의 말에 대해 다윗은 “오늘날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24절)는 말을 하고 자기 길로 갑니다.

다윗은 왜 사울이 말한 대로 사울에게 돌아가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사울의 말을 믿지 못했기 때문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24절의 말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중요한 것은 다윗은 끝까지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해하려고 하지 않겠다고 고백하는 사울의 말은 분명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또 뒤에 보면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누군가가 일러줘도 사울이 다시는 다윗을 수색하지 않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사울에게 돌아가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자신을 구하여 내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자기 길을 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울이나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다윗은 모든 문제를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풀어 나갔습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풀어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제가 있을 때 문제의 답을 내가 미리 정하고 하나님께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해주십시오’라는 내 뜻을 하나님께 내어 놓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다윗과 우리의 다른 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뜻이 팔팔하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뜻이 꺾이는 것에 대해 분노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는 참된 신앙에 있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시는데 우리는 우리의 뜻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겠다고 하니 결국 하나님과 나 사이에 충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다윗이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을 하면서지지 않으려고 기를 쓴 것처럼 지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 매달리는 식의 신앙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잘못된 신앙이 고쳐지지 않으면 우리는 사울처럼 잘못된 길을 갈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신앙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을 가기를 힘쓰는 신앙의 길에 머물러 있습니다. 신앙의 길은 입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몸의 유익만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신앙의 길을 가지 못할 것입니다. 신앙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