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강) 삼상 27:1-12 여호와를 잊었을 때

<본문>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일어나 함께 있는 육백 인으로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각기 가족을 거느리고 가드에서 아기스와 동거하였는데 다윗이 그 두 아내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 되었던 갈멜 여자 아비가일과 함께 하였더니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께 은혜를 받았거든 지방 성읍 중 한 곳을 주어 나로 거하게 하소서 당신의 종이 어찌 당신과 함께 왕도에 거하리이까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다윗이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거한 날 수는 일 년 넉 달이었더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노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거민이라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 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약대와 의복을 취하고 돌아와서 아기스에게 이르매 아기스가 가로되 너희가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 다윗이 가로되 유다 남방과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과 겐 사람의 남방이니이다 다윗이 그 남녀를 살려 가드로 데려가지 아니한 것은 그의 생각에 그들이 우리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다윗의 행사가 이러하여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거하는 동안에 이같이 행하는 습관이 있다 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하였으니 그는 영영히 내 사역자가 되리라 하니라(사무엘상 27:1-12)

<설교>

신앙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귀신에게서도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19절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는 말씀처럼 단지 하나님이 누구시라는 것을 알고 믿는 것은 귀신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믿음은 신자의 신앙의 의미에서의 믿음과는 다를 것입니다. 단지 지식적인 차원에서 믿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고 있다고 해서 다된 것이 아니며 입술로 말하고 고백한다고 해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참으로 힘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환경과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환경이나 형편과 타협하지를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힘들고 어려운 환경이고 형편이니까 다소 신앙을 벗어난다고 해도 이해해주겠다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신앙만을 요구합니다. 때문에 신자는 결코 자기 신앙에 대해 교만할 수 없습니다. 또한 타인의 신앙에 대해서도 섣불리 판단하고 비판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서 낙심하고 염려하며 하나님을 원망할 때 그런 모습을 보면서 ‘신앙이 없다’는 등의 말로서 판단하고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 또한 그 사람과 같은 처지와 형편이 되었을 때 어떻게 될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어려운 처지가 되면 저 사람처럼 낙심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임을 자각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이란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그 모습이 드러나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날마다 하나님을 도우심을 구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환경과 형편을 바라보기보다는 나와 함께 동행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다윗이 사울을 살려준 뒤의 일에 대해 기록한 내용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사울을 살려주었습니다. 사울이 잠들어 있는 좋은 기회에 사울을 죽여 버리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다윗은 그것보다는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써 사울을 죽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 편에 서서 행동하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적어도 이런 수준의 다윗이라면 앞으로 어떤 일에서도 믿음을 드러낼 것이고 오직 신앙에 합당하게만 살아갈 것이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고 말합니다. 즉 다윗이 생각하기를 이렇게 사울에게 계속 쫓기다가는 언젠가는 붙잡혀 죽을 것이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는 것이 살길이라 여겼다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면 사울도 더 이상 자신을 쫓아오지 못할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하나님을 생각하며 행동했던 다윗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블레셋 사람은 이방인입니다. 더군다나 수시로 이스라엘을 침략하며 괴롭혔던 나라가 아닙니까? 그런데 다윗이 그러한 나라에 자신의 의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합당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행동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과연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내용에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서 몰래 가져온 창과 물병을 보여주며 사울에게 외칩니다. 다윗의 말을 들은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다윗에게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돌아가지 않고 자기 길을 갑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돌아가지 않는 것은 사울은 믿을만한 존재가 되지 못함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1절에서 다윗이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비록 사울이 잘못했다는 말을 하긴 하지만 다윗은 그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언젠가는 붙들리게 될 것이라는 불안함에 의해서 피난처로 블레셋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자신이 살길을 스스로 찾아 나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다윗이 지금까지 자신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의 처지와 형편에서 자기 앞일을 걱정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에 대해 승리한 후로 뭇 백성들로부터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칭송을 받았지만 그 일로 인해 사울의 미움과 시기를 사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위기를 넘기면서 사울의 손을 빠져 나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다윗이 살아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함께 하심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전히 쫓기는 상황이지만, 그리고 여건과 형편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도우시므로 이나마 지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지금까지 지내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임을 생각했다면 ‘후일에 사울의 손에 망할 것이다’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26:19절에서 다윗이 자신이 사울에게 쫓겨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라면 기꺼이 죽겠다고 말한 그 마음으로 자신의 처지를 돌아봤다면 사울의 손에 죽을 것이 두려워서 스스로 피할 길을 찾아가고 결국 힘이 있는 블레셋을 의존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결국 본문에서 보여주는 다윗의 모습은 평소 하나님에 대해 고백하는 신앙의 말 그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그대로 노출시켜주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많은 말을 하며 살아갑니다. 은혜, 사랑, 자비, 긍휼, 등등 많은 말을 하지만 그러한 말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참으로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에 대한 어떤 말을 했고 무엇을 기도했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고, 그리고 내가 세상을 어떻게 살았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다윗을 보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은 항상 여호와 앞에서 살아가야 할 삶이라는 것입니다. 시 16;8절에 보면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는 말을 합니다. 다윗의 이 고백은 편안한 시절에 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고민과 문제를 겪으면서, 그리고 자신의 죄와 잘못과 실수를 반복하면서 배우고 깨달은 고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어떤 처지와 형편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고 요동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길임을 고통과 자기 실수와 잘못에서 배운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미래를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생각하기보다는 지금의 어려운 처지와 형편에서 미래를 바라본 것입니다. 그리고 블레셋으로 가는 것이 상책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인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아예 그러한 문제는 잊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사울의 손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몰두했기 때문에 블레셋으로 가는 것이 최선이고 사는 길이라고 여겨진 이상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인가에 대한 생각조차 까맣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살았던 다윗의 삶이 어떠했는가는 뒤의 구절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과 함께 한 육백인과 더불어 가드와 아기스에게로 갑니다. 그리고 아기스는 다윗을 받아 들여 시글락에 있는 자신의 영토를 맡깁니다.

그런데 다윗이 피한 가드의 아기스는 21장에서 다윗이 미친체하여 도망을 쳤던 아기스와 같은 사람입니다. 당시 아기스는 다윗이 미친 것으로 여기고 쫓아내었지만 지금은 육백 명이라는 사람을 이끌고 자신의 수하가 되겠다고 찾아온 것입니다. 아기스는 이러한 다윗에게 자신의 땅을 내어 주고 지키게 한 것입니다. 다윗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한 의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기 위해 손을 잡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다윗이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칩니다. 그런데 아기스에게는 유다 남방과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과 겐 사람의 남방을 쳤다고 거짓말을 합니다(10절). 그리고 자신이 한 일을 아기스가 모르게 하기 위해 자신이 친 사람들의 남녀를 살려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윗이 침략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은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공격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을 돕는 행위입니다. 만약 이것을 아기스가 알게 된다면 다윗에 대해 의심할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아기스는 다윗이 사울에게 쫓긴 몸인 것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과 원수된 관계인 것으로 여기고 다윗을 받아준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스라엘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을 했음을 안다면 다윗이 자기에게 온 것이나 자신의 땅에 거하는 것에 대해 의심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자기 행위를 감추기 위해 공격한 땅의 남녀를 포로로 잡아오지 않고 모두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기스에게는 유다 남방과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과 겐 사람의 남방을 쳤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입장에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쳤다고 함으로써 자신이 이스라엘에게 등을 돌리고 있음을 믿게 함으로써 아기스의 신임을 받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물론 다윗이 친 사람은 이방인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윗의 행동이 무조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자신의 계략과 생각으로 행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거짓된 행동으로 인해서 아기스의 신임을 받게 되고 28장에서 아기스는 이스라엘과의 전투에 다윗이 함께 하도록 하게 됩니다. 하지만 블레셋 장관들은 다윗을 믿지 못하고 의심함으로써 결국 블레셋 땅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30장에 보면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다윗이 있던 곳을 침략하여 다윗의 아내와 자녀를 포함하여 여인들을 모두 사로잡아 간 일이 발생했고 백성들은 슬픈 마음에 다윗을 돌로 치려고 합니다. 그때 다윗은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묻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아말렉을 따라가 침으로써 빼앗겼던 모든 것을 다시 찾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다윗을 다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묻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삶의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사실 우리가 지금 아무리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살겠다고 결심하고 각오를 가진다고 해도 정작 나에게 주어진 그날의 삶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했다가도 수시로 나의 방식과 나의 계획을 앞세우고 살아가게 됩니다. 미래에 대한 염려와 불안감 때문에 내 스스로 나를 지키기 위해 나의 생각에 몰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생각한다거나 하나님께 묻지를 않을 것입니다. 아예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서 수시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하나님께 묻는 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때로는 나의 계획과 생각의 결과가 오히려 나에게 해가 되는 쪽으로 이끌어 가시기도 합니다. 내 계획의 잘못됨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하나님께 묻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앞서 말씀드린 시편 16:8절의 말씀대로 항상 여호와를 내 앞에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호와가 나와 함께 하심을 믿으며 요동치 않게 될 것입니다.

편안한 삶에서 주의할 것은 내 신앙에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삶이 편안할 때는 삶의 문제 때문에 고민할 것도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단지 간혹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믿는다고 고백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때문에 자신에게서 문제를 발견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으로 인해서 낙심하고 염려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의 신앙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별 문제 없다고 해서 자기 신앙을 과신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을 항상 연약한 자로 여겨야 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타인의 삶에서 발견하고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을 막는 길입니다. 편안할수록, 삶에 문제가 없을수록 더욱 더 힘써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시고 살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편안함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임을 생각하고 힘들고 어려운 삶에 있는 성도를 바라보면서 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의 어려운 삶에 마음으로나마 함께 할 것이고 그들의 나약한 모습에 대해 판단하거나 업신여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의 처지가 힘들고 어렵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누구의 도움이었으며 힘이었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지금의 형편이 어렵다고 해도 그 자리까지 오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다윗이 쫓기는 처지이긴 하지만 위기 때마다 하나님이 다윗을 도우시고 구하셨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울 때 잊어서는 안될 것은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는 고백입니다. 지금의 자리가 고통이고 어려움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다면 진작 망하고 죽었어야 할 존재이며 이보다 더 큰 고통에 빠져 헤어날 수 없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앞으로 살아갈 미래도 하나님께 맡기게 될 것입니다. 이 자리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이 남은 인생도 인도하실 것임을 믿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항상 여호와를 내 앞에 모시고 살아가는 삶이며 이것을 두고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결코 말로 멋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때로는 편안함에서 때로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절망가운데서 낙심도 하고 실망도 하면서 조금씩 하나님을 배우고 만나는 것입니다. 양복입고 자가용타고 아무런 장애물도 어려움도 없이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넘어지고 부서지고 깨어지면서 그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다윗이 ‘내가 후일에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라고 생각한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때 우리 또한 이러한 어리석음에 빠져 들게 됨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아멜렉을 보내서 다윗의 아내와 자녀들과 모든 여인을 빼앗아 가게 한 것처럼 하나님은 나의 계획과 생각에 몰두하여 살아가는 어리석은 우리들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기 위해 이런 저런 일이 있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다면 그것은 큰 은혜이며 복입니다. 이것을 알 때 내 뜻대로 안되고 넘어지는 결과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신자가 요동치 않는 것입니다.

항상 여호와를 여러분 앞에 모시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바쁜 세상의 삶에서 조심할 것은 여호와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우편에 함께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