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강) 삼상 28:1-2 다윗의 딜레마

<본문>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한지라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밝히 알라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 한가지로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그러면 당신이 종의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그러면 내가 너로 영영히 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 하니라(사무엘상 28:1-2)

<설교>

지난 시간에는 신자가 여호와를 잊었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되는가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윗은 분명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골리앗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나가 대결하여 승리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러한 그가 사울로 인하여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고 결국 망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살길을 찾아 블레셋에 몸을 의탁하는 장면을 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였습니까?

저는 지난주에 이 말씀을 설교하면서 우리에게 있는 신앙은 결코 내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깊이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내게 주어진 신앙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내 스스로 신앙을 만들어 내어 내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골리앗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까지 살려준 것이 다윗의 신앙이었다면 그러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사울로 인해 망할 것을 두려워하여 원수인 블레셋에 몸을 의탁하려 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행동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곧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붙드심이 아니면 한시도 신앙에 머물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알기에 신자는 항상 여호와를 앙망하며 여호와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행동은 신자가 무엇에 힘쓰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항상 여호와를 잊지 않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신자를 유혹합니다. 베드로전서 5:8절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의 대적인 마귀는 세상을 이용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삼키기 위해 두루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산다면 우리는 깨어 있을 수 없고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신자로 하여금 여호와를 잊도록 만듭니다. 어려운 상황과 고통과 힘든 문제들이 있을 때 하나님보다 그것들을 바라보게 하고 그 문제와 어려움에 대해 깊이 빠져들게 만듭니다. 결국 고민하게 되고 염려와 근심에 빠지게 되고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누가 나를 이도하셨고 살게 하셨는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힘으로 살길을 마련하기 위해 힘쓰게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삶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신자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신앙이 아닌 길을 가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과의 타협입니다. 그리고 타협을 하는 이유는 세상의 힘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고, 세상의 힘을 이용하고자 하는 것 때문입니다. 힘이 있어야 나의 일이 잘된다는 것 때문에 타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협은 타협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세상과 타협했을 때 결국 타협으로 인해 갈등과 곤란함에 빠지게 되고 신자의 존재성 자체에 큰 위기가 오게 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을 다시 보면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한지라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밝히 알라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 한가지로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군대를 모집합니다. 그런데 아기스가 다윗과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까지 군대에 참가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기스가 다윗을 자기편으로 여긴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아기스가 다윗을 자신의 편으로 여기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는 그술, 기르스, 아말렉 사람을 쳤으면서도 아기스에게는 반대로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유다 남방사람,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 겐 사람의 남방을 쳤다고 거짓말을 한 이것이 아기스로 하여금 다윗을 자신의 편으로 인정하게 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아기스를 속여 그로 하여금 자기를 이스라엘에 대해 미련을 버린 아기스의 사람이 된 것으로 믿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러한 계략은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전투를 하게 되고 아기스가 다윗에게 군사로 참가할 것을 말함으로써 오히려 큰 고민으로 다가오게 되었을 뿐입니다.

다윗이 전투에 참가할 경우 아기스와 블레셋 군대와 장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스라엘과 싸워야 합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엄청난 고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다윗이 실제로 아기스 편에 서서 이스라엘과 전투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게 죄를 범하는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함 받은 하나님 부르심 자체를 버리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했을 때 블레셋 편에 서서 블레셋의 군사로서 자신들과 싸운 사람을 왕으로 인정을 하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과 싸우기를 거부할 상황도 못됩니다. 만약 거부했을 때 아기스를 배신한 죄로 살아남기가 힘들게 되지 않겠습니까? 다윗은 이스라엘과 싸울 수도 없고 싸우지 않을 수도 없는 곤란함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자신은 아기스 편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아기스를 이용하려고 했던 다윗의 계략은 오히려 자신을 더 큰 어려움으로 밀어 넣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계략과 수단으로 살고자 하는 일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러면 당신이 종의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2절)라는 모호한 대답을 합니다. 싸우겠다는 것도 아니고 싸우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라 나의 행할 바를 아기스 당신이 안다는 답을 한 것입니다. 이 역시 싸우겠다는 말을 함으로써 이스라엘을 반역하고 하나님께 죄를 짓는 행위를 하지 않고 싸우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위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의 다윗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전혀 드러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인데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과 싸울 수가 있는가?’라는 사실을 떳떳하고 당당하게 아기스에게 증언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함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의 이런 나약함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인도하심을 보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모든 상황의 앞날을 자기 스스로 미리 상상하기 때문에 당당함을 내 보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실용적인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 때로는 아무리 사소하게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 신자인 우리를 성경의 원칙에서 벗어나게 만들기 위해 항상 문 앞에 도사리고 기회를 엿보는 도구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타협은 타협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자에게 크나큰 신앙의 갈등을 안겨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를 우리에게 ‘현실적인 사람’이 될 것을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갈등은 바로 이것입니다. 신앙의 사람으로 머무느냐 아니면 신앙은 교회에서만 통용하고 세상에서는 현실적인 사람으로 머무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정하고 신앙하는 사람이지만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현실적인 사람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다윗이 가드로 가고 아기스를 속이게 된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의 변화를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을 때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해지고 불안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살길로서 블레셋을 택한 것이야 말로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의 대처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다윗의 현실적인 입장에 서서 다윗을 생각할 때 이러한 행동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현실과 타협하게 만들고 자신을 정당화 하며 나중에는 아예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으로 전락하게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때로 죄의 경중을 따져가며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이정도는 죄라 해도 가벼운 것이니까 괜찮을거야’라든가 ‘이 정도는 내 힘으로도 얼마든지 안할 수 있으니까 이번만 하고 다음에는 하지 말자’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스스로에게 속는 것입니다. 가벼운 죄 무거운 죄란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죄가 있고 이길 수 없는 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란 어떤 행동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에게도 힘이 있음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죄악 속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고 이길 수 있는 죄가 있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이미 사단의 유혹에 빠진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현실적인 입장에서 여러분의 문제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결과는 여러분의 힘으로 문제를 벗어나기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게 되고 때로는 문제를 벗어나기 위해 신앙을 포기하는 타협도 불사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현실적인 문제든 무엇이든 모든 것을 신앙의 위치에서 생각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울이 변화가 되었든 되지 않았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지금껏 다윗을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지금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의지이며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현실과 상관없이 다윗의 장래의 모든 일도 하나님의 뜻과 의지대로 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고 의지하고 바라볼 뿐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분뿐입니다. 이것이 신앙적인 위치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시각으로 현실을 살아가야 함을 다윗을 통해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미래를 여호와께 맡긴다는 것을 믿지를 못합니다. 여호와께 맡기는 것보다는 현실이 나아지는 것만이 미래에 대한 보장이라고 여겨버립니다. 이것은 명백한 불신앙입니다. 여호와의 전능하심과 살아계심을 믿지 못하는 것이고,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여 동행하시고 인도하시고 지키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삶에서 여호와를 만나고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배우지 못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삶에서 여호와를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했기에 믿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현실을 바라보고 미래를 전망합니다. 현실이 나쁘면 미래까지 나쁠 것이라고 생각하고 현실이 좋으면 미래 역시 그 전망이 밝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래는 여호와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미래시며 미래의 전망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아무렇게나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에게 현실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책임과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순간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 84:5-7절에 보면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고 말합니다.

시온의 대로라는 것은 하늘나라를 향한 큰 길을 뜻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신약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에게 시온의 대로는 그리스도가 아니겠습니까? 즉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은 모든 힘을 주께로부터 얻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미래를 위한 길을 블레셋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이스라엘과 싸워야 하는 위기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날마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길은 세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신앙이 아닌 길은 가지를 마십시오. 그리고 이것을 위해 현실보다는 우리의 마음에 대로로 존재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주께 힘을 얻으십시오. 현실로 가는 길의 마지막과 주님으로 가는 길의 마지막을 생각하십시오. 현실은 잠깐이지만 주님은 영원하다는 것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여기에 붙들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주님이 누구신가를 열심히 항상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신자에게 사소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삶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스스로 미래를 상상하며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기 위해 현실적인 길을 걸어갈 때 어떤 곤란과 어려움에 빠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여러분께 길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길을 가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길을 가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사람들입니다. 현실에 마음 뺏기지 마시고 현실에 속지 마시고 지금도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의존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미래는 대로이신 주님께 있는 것이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의 어떠한 문제이든 피할 길은 여호와께 있는 것이지 우리의 계획이나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에서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지혜이고 신자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