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강) 삼상 28:3-7 사울의 불신앙

<본문>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애곡하며 그의 본성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었더라 블레셋 사람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쳤더니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사무엘상 28:3-7)

<설교>

오늘 본문은 사울이 블레셋 군대로 인하여 크게 두려운 나머지 신접한 여인, 즉 무당을 찾아가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사울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나는 사울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갖기가 쉽습니다. 이유는 ‘나는 무당을 찾아가지 않았다’는 것 때문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무당을 찾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토정비결이나 사주를 보는 일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사울과는 다르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심사숙고해야 하는 것은 ‘사울 같은 행동이 있는가?’가 아니라 ‘사울 같은 사고방식이 있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는 사울은 철저하게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역시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의 모습과는 전혀 동떨어진 신앙이 없는 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울을 살피면서 과연 그가 어떤 사고방식에 머물렀기에 이러한 행동이 나오게 되는가에 관심을 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사울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애곡하며 그의 본성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 내었었더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은 사무엘이 죽었다는 얘기는 이미 25:1절에서 언급한 바가 있는데 왜 또 다시 언급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3절에서 말하는 사무엘의 죽음은 현재의 일이 아니라 이미 예전에 있었던 일을 다시 언급하는 것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무엘이 죽었다는 얘기를 한 후에 4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이 수넴에 이르러 진을 친 것과 사울이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을 친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렸다는 말을 합니다. 사울은 블레셋 군대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여호와께 묻습니다. 아마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물음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전혀 응답지를 않으신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도 답을 하지 않으시고 침묵을 하시니 사울은 매우 답답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신접한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목적은 11절을 보면 사무엘을 만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사무엘이 나타나 사울에게 말을 하기는 하지만 죽은 사무엘이 다시 나타난 것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말씀을 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사울의 사고방식에 대해 언급을 하고자 합니다.

사울의 사고방식이 어떠했느냐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3절에서 사무엘의 죽음을 반복해서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살피는 것으로 시작을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사무엘이 죽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3절이 기록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무엘이 죽은 것을 밝히기 위해서라면 25:1절의 내용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사무엘의 죽음에 대해 새삼스럽게 언급하는 것은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요구하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이미 죽은 자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울의 사고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불신앙을 드러내고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생존했을 당시 이스라엘의 선지자였든 지도자였든 상관없이 이미 죽은 자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단절을 의미합니다. 생존했을 때도 사무엘은 의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세우셨고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이미 죽은 사무엘을 만나고자 합니다. 이것이 철저하게 사무엘을 의지하고 있던 사울의 모습인 것입니다. 죽은 자의 영혼이라도 만나서 블레셋과의 위기 상황을 해결해 보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의 내용은 단순히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무당을 찾아가지 말라거나 점을 치지 말라는 교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미 죽은 사무엘을 만나려고 하는 사울의 사고방식을 살피고 행여 우리가 그와 같은 생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울처럼 존재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자신하는 우리의 잘못됨이 있다면 그것을 깨닫고 정당한 신앙의 길을 찾아 가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사울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사울과 같은 사고방식, 사울과 같은 기질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감추어져 있을뿐이고, 교묘하게 신앙으로 위장하여 존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는 행동을 보면서, 사울이 믿음이 없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사울은 믿음이 있는 자가 아닙니다. 철저한 불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울의 불신앙은 무엇입니까?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행동이 불신앙입니까?

사실 사울은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기 전에 여호와께 물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신앙입니까 신앙이 아닙니까? 사울이 여호와께 물었지만 여호와께서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울의 심정이라면 이런 경우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평온한 상황이 아닙니다. 매우 긴박한 위기 상황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 물었으나 여호와는 잠잠하시고 침묵하십니다. 아무런 답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울의 입장이라면 매우 답답하고 조바심이 나지 않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은 잠잠하시니 죽은 사무엘이라도 만나기 위해 영혼을 부른다고 하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할 때 내 스스로 정직히 물어야 할 것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십니까? 혹시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권능으로 나를 도우시지 않겠는가하는 기대감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기대감으로 하나님을 의지했는데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움이 전혀 없고 고통만 거듭 가중되고 하나님께 기도해도 침묵하시고 잠잠해 버리신다면 믿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분명 신뢰의 방향이 다른 것으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사울의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이를 잃었을 때 하나님을 부르며 아이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해달라고 밤새워 기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잠잠하시고 조용하십니다. 그럴 때 누군가가 용한 점쟁이가 있다고 말할 때 과연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은 잠잠하시니 다른 것이라고 찾아서 아이를 찾아야겠다는 마음이 일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문제에서 잘못된 것은 자신의 일에 도움을 얻기 위한 목적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즉 날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날 위해 살아가는 사고방식은 결국 자신을 위한 길로 나아갈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되는 방법과 길을 찾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령 신앙의 길이 아니라 할지라도 외면해 버리고 자신의 득을 찾을 뿐입니다. 이것이 사울의 사고방식이고 오늘 우리가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우리는 결국 사울과 같다는 판단을 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득이 되느냐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오직 여호와가 참된 신이기 때문에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참된 분은 하나님이시고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심지어는 하나님이 자신을 치는 것까지 신뢰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자신의 어려움과 고통의 문제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다’라는 기대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나의 고통과 문제에도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고, 설사 내가 망하고 실패한다고 해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담겨 있다. 다만 내가 그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흔들릴 뿐이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에 흔들림이 없는 것이고 이것이 진정한 신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뢰에는 무엇보다 의심이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신뢰한다면 상대방의 어떤 행동도 믿어야 합니다. 옆에서 누군가가 그 사람에 대해 험담을 하고 무슨 말을 한다 할지라도 의심도 흔들림도 없어야 합니다. 설사 나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그가 했다 할지라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어주는 것이 신뢰다운 신뢰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신뢰합니까? 어쩌면 우리는 조그만 바람에도 흔들려서 나무에 붙어있지 못하며 떨어지는 낙엽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 붙어 있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가벼운 바람만 불어도 이리저리 흔들리고 의심이 되고 불안감만 남는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향한 마음에 다른 힘 되는 것을 찾고 기대하는 유혹만 남게 될 뿐입니다.

3절을 보면 사울은 나라를 다스리던 시기에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낸 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의 죽음과 함께 그 사실을 언급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이처럼 사울이 신앙이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낸 행위가 결코 신앙이 아니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결국 사울은 자신이 쫓아낸 신접한 자를 찾아가는 것을 통해서 예전의 자신의 행위가 신앙과 상관이 없는 것이었음을 스스로 폭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2:20-22절에 보면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는 말을 합니다. 사울이 꼭 이런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손으로 쫓아낸 신접한 여인을 다시 찾아가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사울의 모습이야 말로 개가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꼴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개가 토한 것이나 돼지가 씻은 것이 그 행동만은 옳은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못 먹을 것을 먹었기에 토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더러움을 알았기에 씻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못 먹을 것이고 더럽다는 것을 안 상태였다면 토한 것에 다시 돌아갈 수 없고 더러운 구덩이에 다시 누울 수가 없습니다. 결국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쫓아낸 것이 하나님만을 신뢰한 신앙에서 나타난 행위였다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다시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접한 여인을 쫓아낸 것은 신앙에서의 행동이 아니라 단지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기도할 때 그 내용을 보면 세상의 악함을 말합니다. 신자는 세상과 어울려 살아서는 안됨을 말하고 돈을 의지해서도 안되고 욕심으로 살아서도 안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만을 들어보면 모두가 참된 신앙입니다. 먹을 수 없는 것을 먹었기에 토해 버리는 것과 같은 기도이고, 더럽기에 씻고자 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예배당을 벗어나서의 삶은 어떻다고 생각합니까? 과연 내가 토해 버린 것에 다시 가지 않으려고 힘을 쓰는 삶이라고 생각합니까? 씻어버린 더러움이 다시 묻을 것을 염려해서 더러움을 피하려고 애를 쓰는 삶이라고 생각합니까? 오히려 기도를 할 때는 토해 버리고 씻어버렸던 것들을 다시 찾아가고 눕고 먹는 모습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기도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냥 나의 신앙을 가장한 것뿐입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기도라고 여겨지기에 단지 그렇게 기도했을 뿐입니까? 나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말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말과 행동을 책망하고 나무라기 위해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나 자신의 현재 모습을 깊이 살피자는 것입니다. 신앙자리에 머물러 살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사울과 같은 사고방식이면서도 나 스스로는 신앙에 별 문제 없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를 살피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신뢰합니까? 그렇다면 무엇에 대해 신뢰하십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 자체를 신뢰하고 믿으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어려울 때 하나님이 도우실 것을 신뢰하시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믿음을 깊이 점검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울이 자신의 손으로 쫓아낸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서 그의 도움으로 이미 죽은 사무엘을 만나고 싶어하는 그것이야 말로 블레셋으로부터 자신과 자신의 나라를 지키려고 하는 최선의 노력입니다. 자신의 목숨과 국가를 보존하기위해 하나님께 물었으나 하나님은 잠잠하시니 사단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물었는데도 불구하고 잠잠하시고 침묵하실 때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합니까? 아니면 답답한 마음에 다른 힘이 되고 해결될 길을 찾으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잠잠하시다는 것 때문에 답답하다면 그 이유는 자기의 것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하나님께 물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것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답답해하고 조바심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내 스스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 일을 돕기 위해 나를 택하시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나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하나님을 찾는다면 우린 결국 사울일 뿐입니다. 신앙은 나를 지키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