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강) 삼상 28:8-19 죽은 사무엘이 나타남

<본문>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는 사울이 가로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사울의 행한 일 곧 그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 땅에서 멸절시켰음을 아나니 네가 어찌하여 내 생명에 올무를 놓아 나를 죽게 하려느냐 사울이 여호와로 그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네가 이 일로는 벌을 당치 아니하리라 여인이 가로되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 올리랴 사울이 가로되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 모양이 어떠하냐 그가 가로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로 분요케 하느냐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군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기로 나의 행할 일을 배우려고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여호와께서 나로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라(사무엘상 28;8-19)

<설교>

사울은 자신을 위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갑니다. 이 경우 우리는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는 행위 자체를 비난하고 문제 삼는 것에 치중한 위험이 있음을 지난 시간에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신접한 여인을 찾는 행위 자체를 비난거리로 삼는다면 결국 사울과 같은 행위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사울과 같은 행위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신앙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울의 행위를 문제 삼고 비난하기보다는 행위의 배경인 사울의 사고방식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사울의 행위의 배경에는 ‘자신을 위함’이 깔려 있습니다. 이는 사울이 신하에게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7절)고 지시한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무당이든 뭐든 뭔가 초월적인 능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에 관심을 두고 찾아가는 모든 목적은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함에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문제, 자신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는 사울의 이 사고방식이 비록 우리가 무당을 찾지 않고 점쟁이를 찾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을 찾는 목적과 이유에 내포되어 있다면 그러한 우리 자신을 사울과 다르다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심사숙고하여 나 자신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신을 찾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신을 자신의 영역에 끌어 들이기 위해 노력을 한다는 것입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하면서 자신의 정성을 보이고 헌물을 바치는 모든 이유도 신을 자신의 영역에 끌어들이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기독교의 다른 점은 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부르신 하나님, 나를 만드시고 나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성품과 자비와 긍휼하심에 감사하며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에 순종하기 위해 나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나에 대한 관심에서부터는 벗어나고 대신 하나님의 뜻에 대해 관심을 두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중점으로 사울을 살펴본다면 사울의 잘못됨은 신접한 여인을 찾았다는 행동보다는 자신을 위해 신을 찾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쌔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는 사울이 가로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올리라”고 말합니다.

사울이 여인에게 부탁한 것은 신접한 술법으로 자신이 말하는 사람을 불러올리라는 것입니다. 즉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울은 신접한 술법으로 죽은 자의 영혼을 부를 수 있음을 믿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스올, 즉 음부라고 하는 지하세계로 들어간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천사와 같은 존재는 하늘의 어느 공간에 거주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불러올리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죽은 자의 영혼을 음부로부터 불러올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죽은 사무엘이 다시 사울에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가 힘든 내용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 본문의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진위여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즉 사람이 죽고 나면 영혼이 다른 세계로 들어가고, 그 영혼을 다시 불러 낼 수 있느냐라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죽은 사람의 귀신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당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자유롭게 부를 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단 한가지 꼬집고 넘어갈 것은 인간의 부패성은 쓸데없는 일에 대한 관심에까지 그 범위가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신자로서 관심 둬야 할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무관심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것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본문의 내용에 대한 부분입니다.

사실적으로 말해서 죽은 자의 귀신이 있느냐에 대한 것은 쓸데없는 관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당이 귀신을 부를 수 있느냐라는 것도 역시 쓸데없고 무가치한 관심입니다. 만약 죽은 자의 귀신이 있고 무당이 그 귀신을 불러내서 귀신의 능력으로 앞일을 알아낼 수 있다고 한다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신통력이 있는 무당을 찾아가서 앞일에 대해 문의하고 싶다는 것입니까?

그런 의도가 아닐 바에는 귀신이 있든 없든 그런 문제들은 신자의 신앙생활에 하등에 연관이 없는 것들입니다. 설사 무당이 귀신을 불러내어 대화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할지라도 답은 같습니다. 그런 장면으로 인해서 믿음이 흔들리고 무당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진다면 그것은 아예 예전부터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증명에 불과할 뿐입니다.

물론 호기심이라고 할 수 있고, 신기한 일이기 때문에 알고 싶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의 호기심은 하늘을 향하는 것이 마땅하고, 신기한 일 역시 부패하고 사망에 처한 우리를 건지시고 아들의 피로 죄를 씻어주신 하나님의 일인 것이지 무당이 죽은 자를 만나는 것 따위를 가지고 신기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신자인 사람들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나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일들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고 무당이나 점쟁이의 진위 여부에 대해 관심을 두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설사 점쟁이가 우리의 알 일을 알아맞히고 무당이 귀신을 불러내어 만난다고 해도 그들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능력을 그들이 행한다고 해도 그 능력으로 우리를 천국에 있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 어떤 능력이나 잡술을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의 세계, 통치의 세계를 침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쓸데없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바램은 버리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12-14절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 모양이 어떠하냐 그가 가로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죽은 사무엘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사울은 그 사무엘에게 얼굴을 땅에 대고 절을 합니다. 앞서 말한대로 이러한 내용은 ‘죽은 자가 다시 나타날 수 있느냐?’라는 의문을 우리에게 가지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이미 죽은 자라 할지라도 다시 만나고 싶어 하는 그 정신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사울과 같은 그러한 정신상태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물었으나 하나님이 대답치 않으시자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서 이미 죽은 사무엘을 만나고자 합니다. 죽은 사무엘을 다시 만나서라도 자신의 문제에 대한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답하지 않으시고 잠잠하시니 자신에게 도움을 줄 신적인 대상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역시 이러한 사고방식이 숨겨져 있음을 깨닫고 우리 스스로를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죽은 사무엘이 다시 나타난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신학자들의 의견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타당하게 여기는 것은 사단이 사무엘의 혼을 가장하여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사단이 가장하여 나타난 것으로 보는 것이 이해하기가 쉽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진짜 사무엘의 혼이라면 무당의 술수에 의해 나타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단이 가장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가장 편하게 이해하는 길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이 사무엘을 가장하여 나타났다면 15-19절까지의 사무엘의 말은 사단의 말이라는 결론이 됩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한 말의 내용을 보면 도저히 사단의 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울의 잘못됨을 책망함과 동시에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여 세우시고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사울이 죽는다는 것에 대한 예고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무엘을 다시 세워서 사울을 책망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단이 사무엘을 가장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사무엘을 다시 사울에게 보내셨다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해도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당이 사무엘을 불러내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무당을 통해서 사무엘을 사울에게 나타나게 하신 것이냐? 라는 의문도 제기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문을 보면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을 부르기 위해 뭔가 행했다는 것이 없습니다. 11절에 사울이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하자 12절에서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고 되어 있을 뿐 사무엘을 부르기 위해 주문을 왼다거나 무녀 춤을 추는 등의 무속 행위를 했다는 기록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무엘은 신접한 여인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에 의해 나타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은 자가 다시 나타날 수는 있는 것입니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하고자 하신다면 못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민수기에 보면 발람이라는 선지가가 나귀를 타고 가다가 나귀로부터 책망을 받는 일이 있습니다. 나귀가 말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관심은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에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이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나귀가 말을 할 수 있느냐?’라는 의문이 아니라 ‘나귀를 말하게 하셔서 발람을 책망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에 관심을 두는 것이 옳은 것처럼 ‘죽은 사무엘이 다시 나타날 수 있느냐? 그러면 죽은 자의 영혼을 만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과 호기심보다는 ‘하나님이 죽은 사무엘을 다시 사울에게 나타나게 하신 뜻이 무엇일까?’라는 관심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관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 죽은 사무엘을 만나고 싶어 한 것은 자신에게 필요한 말을 듣고 싶어서였습니다. 15절의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로 분요케 하느냐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군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기로 나의 행할 일을 배우려고 당신을 불려 올렸나이다”고 말한 내용을 보면 사울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사울은 블레셋이라는 급한 문제를 자신의 급한 문제에 해결을 위해 사무엘을 만나고 싶어한 것입니다. 모든 관심이 자신의 문제 해결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로 분요케 하느냐’라고 말한 것을 보면 마치 사울이 불러서 나타난 것처럼 얘기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사울에 의해서 사무엘이 나타난 것처럼 이해되지 않겠습니까? 때문에 이 말은 사울의 불순종과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이 다시 사무엘을 사울에게 세우신 것을 두고 한 얘기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쨌든 사무엘은 사울 때문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사울에게는 아마 하나님은 자신의 물음에 답하지 않으셔도 사무엘이라면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필요한 말을 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울의 기대는 무참히 무너져 버립니다. 나타난 사무엘마저 자신이 원하는 말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사무엘이 살아있을 때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확증하는 말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결말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사무엘을 다시 나타나게 하셔서 사울에게 필요한 말을 주신 것이지 사울이 듣고 싶어한 말을 주신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점을 오늘 우리는 깊이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당을 찾고 점쟁이를 찾는 이유는 자기 자신의 문제와 앞일을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모든 관심에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가장 큰 문제이고 관심거리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을 이유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어떤 신통한 능력이 있든, 귀신이 존재하든 말든 그런 것은 신자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관심거리가 아니겠습니까?

무당을 찾는 것이 왜 우상을 섬기는 것인 줄 아십니까? 단순히 무당을 찾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초월자를 찾는 그 사고방식이 바로 우상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 대상이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면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기는 망령된 일을 행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우리가 필요로 한 것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으로 주신 것을 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반대로 내가 필요로 한 것을 받고 싶어 할 뿐입니다. 이제 이러한 무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 일 때문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내 일은 모두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기 위해 일하실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믿고 신뢰하면 됩니다. 설사 지금의 형편과 환경이 풍랑 한가운데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면 됩니다. 고난과 고통이라 할지라도 나에게 필요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믿는 것이 믿음이고 신자는 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