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강) 삼상 29:1-11 도우시는 하나님

<본문>

블레셋 사람들은 그 모든 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쳤더라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은 수백씩 수천씩 영솔하여 나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서 나아가더니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가로되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 아기스가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에게 이르되 이는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이 아니냐 그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에게 노한지라 블레셋 방백들이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을 돌려 보내어 왕이 그에게 정하신 그 처소로 가게 하소서 그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가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하나이다 그가 무엇으로 그 주와 다시 화합하리이까 그들이 춤추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던 이 다윗이 아니니이까 아기스가 다윗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네가 정직하여 내게 온 날부터 오늘까지 네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나와 함께 군중에 출입하는 것이 나의 소견에는 좋으나 장관들이 너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너는 돌이켜 평안히 가서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에게 거슬려 보이게 말라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당신의 앞에 오늘까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나로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 아기스가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내 목전에 하나님의 사자같이 선한 것을 내가 아나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은 말하기를 그가 우리와 함께 전장에 올라가지 못하리라 하니 그런즉 너는 너와 함께 온 네 주의 신하들로 더불어 새벽에 일어나라 너희는 새벽에 일어나서 밝거든 곧 떠나라 이에 다윗이 자기 사람들로 더불어 일찌기 아침에 일어나서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가고 블레셋 사람은 이스르엘로 올라가니라(사무엘상 29:1-11)

<설교>

인간의 관계를 보면 손해와 이익의 여부를 따라 형성되고 수시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 뜻이 일치하여 친구가 되고 한 집단으로 형성되었다가도 그 관계 유지로 인해서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가 주어질 것이 예상되면 가차 없이 뒤돌아서고 오히려 적이 되는 경우를 수없이 볼 수 있으며 또 우리 자신들도 그러한 모습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벗어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말이 있나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내 자신 또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결심이나 각오도 주변 여건과 상황에 의해서 얼마든지 포기해버리고 자신의 생계와 생존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믿을 수 없는 인간을 불러다가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인간을 믿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택한 하나님의 백성만큼은 세상 사람과 다르게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살아갈 것을 믿으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믿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를 믿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은 스스로의 신실하심을 따라 일하시는 것이지 인간을 의존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주변 여건이나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택하여 부른 인간이 설령 불의한 행동으로 나아간다 할지라도 그에 대한 손길을 포기하거나 거두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인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대해 방해물일 뿐입니다.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이 수시로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무너뜨리는 모습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은 쇠하거나 중지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시고 신실하심과 전지전능하심으로 날마다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의지하고 소망하고 바라볼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이지 어떤 사람의 도움이나 세상의 도움을 받고 사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다면 그를 세우신 분이 계심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결코 사람을 바라볼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봐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윗을 말하기 전에 먼저 사울에 대해 다시 살펴보면 사울은 무당의 도움을 받아서 죽은 사무엘을 만나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있는 지금의 난국을 해결할 수 있는 도움의 말을 듣고자 합니다. 사울의 이 모습이야 말로 철저하게 사람을 의존하고 있는 불신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내쳤던 무당에게까지 찾아가서 부탁의 말을 하는 이 모습이야 말로 하나님의 법도와 말씀이 살아있는 힘과 기준이 되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따라 행동하는 불신앙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결코 사울을 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에게서도 사울의 모습은 얼마든지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둔 위기상황에서 무당을 찾아가고, 죽은 사무엘을 다시 불려내고자 하는 사울의 행동은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행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최선으로 살아가기에 사울을 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실체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택함 받은 다윗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다윗 역시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울로 인하여 망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블레셋에 거짓으로 투항합니다. 그리고 아기스의 충성한 신하로 행세합니다. 결국 사울이나 다윗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이들은 모두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심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하려고 함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지를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다윗은 블레셋 편이 되어서 이스라엘과 싸워야 하는 위기의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스스로를 지키고자 한 노력이 오히려 자신을 위기의 몰아넣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보여주는 29장의 내용입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과연 다윗은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의 다윗의 모습을 본다면 다윗 역시 사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방인이며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을 의지해서 자신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아기스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가까운 사람을 쳤다는 거짓말도 합니다(27:10). 분명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다윗을 돕고 계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를 보며 도울 만한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자를 끝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도우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용하여 방종으로 나아간다면 또 다른 불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블레셋 편이 되어 이스라엘과 싸워야 하는 위기에 처한 다윗에 대한 도우심은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이 다윗을 신임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3절을 보면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가로되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 아기스가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에게 이르되 이는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이 아니냐 그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아기스는 다윗에 대해 전폭적으로 신임을 하지만 그의 방백들은 다윗을 의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기스는 다윗에 대해 열심히 변호하였지만 방백들은 오히려 아기스에게 화를 내게 됩니다. 5절의 “그들이 춤추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던 이 다윗이 아니니이까”라는 말을 보면 뱅백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다윗이 혹 전투 중에 이스라엘과 다시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불안해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아기스가 다윗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네가 정직하여 내게 온 날부터 오늘까지 네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나와 함께 군중에 출입하는 것이 나의 소견에는 좋으나 장관들이 너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너는 돌이켜 평안히 가서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에게 거슬려 보이게 말라”(6,7절)는 말로써 아기스는 다윗을 돌려보내게 됩니다. 이것으로 다윗은 이스라엘과 싸워야 하는 위기와 갈등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돌아가라는 아기스의 말에 대해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당신의 앞에 오늘까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나로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8절)라고 말하면서 아기스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보이는 척 행합니다. 이러한 다윗에게서 예전에 골리앗을 무너뜨린 믿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사울에게 도망쳐 다니면서 하나님을 의지했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살려주는 다윗을 볼 수 있습니까? 그래서 믿음은 인간의 각오도 다짐도 아니고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인간의 소유물도 아닌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오직 불신앙의 속성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 인간을 다스리시고 고치시면서 믿음으로 행하게 하시는 분이 곧 여호와 하나님인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잊지 않으면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신자에게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일하시고 행하신 결과임을 고백하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어던 믿음의 행위도 결코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키시고 보호하신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믿음을 지켜온 것이 아닙니다. 우린 다만 내 자신을 위해 힘쓰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왔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불신앙의 속성은 우리를 얼마든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로 살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심으로 인해서 지금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신자는 이것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서 모든 일을 계획하고 힘쓰고 노력하지만 사실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지금껏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지 우리의 힘과 노력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말고 살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떤 계획을 세우고 힘쓰고 노력한다고 해도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진다는 믿음에서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계획한 일이 잘되든 안되든 상관없이 신자는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단지 교회를 출석하고 있으니까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닙니까? 하지만 그것은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를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그것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말해주고 있으며 하나님의 무엇을 믿고 의지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행위를 보지 마시고 다윗을 지키시고 도우신 분이 누구신가를 생각하십시오. 다윗의 행함이 어떻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분임을 잊지 마십시오. 자신의 행위를 기준 삼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짐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잊어버린 모습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잊게 하고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간과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었다는 것만으로도 말할 수 없는 복의 자리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세력과 훼방에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의 관계에 놓이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삶에서 두려워 할 것도 두려워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 뜻대로 자기 백성을 도우시며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다윗은 블레셋의 전투에 참여해야 하는 갈등에서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갈 까 열심히 궁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이 고민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홀로 고민하고 방법을 모색하면서 빠져나갈 길을 찾고 있을 때 하나님은 이미 다윗을 지키시는 일을 실행에 옮기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키심과 도우심이 놀랍지 않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블레셋 방백들의 반발로 인해서 자신의 고민과 갈등이 해소되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보지를 못합니다. 더욱 더 강력히 아기스의 신실한 신하 행세를 합니다. ‘왜 돌려보내는가?’라고 거짓된 항의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철저하게 아기스 편임을 보이기를 힘쓸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어리석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키심 아래 거하면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합니다. 다만 어려움이 해소되었다는 것만으로 기뻐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함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런 무지함을 깨우치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절대로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윗의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을 지키시고 계십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세워서 일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절대로 포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불신앙에도 하나님의 뜻은 방해받지 않고 하나하나 시행되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지키시고 도우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 욕심을 이루기 위한 도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도우시고 지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키심 아래 있는 그가 복있는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