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강) 삼상 30:21-30 공평의 정신

<본문>

다윗이 이왕에 피곤하여 능히 자기를 따르지 못하므로 브솔 시내에 머물게 한 이백 인에게 오매 그들이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을 영접하러 나온지라 다윗이 그 백성에게 이르러 문안하매 다윗과 함께 갔던 자 중에 악한 자와 비류들이 다 가로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 사람의 처자만 주어서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 다윗이 가로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를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일반일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그 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시글락에 이르러 탈취물을 그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어 가로되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하고 벧엘에 있는 자와 남방 라못에 있는 자와 얏딜에 있는 자와 아로엘에 있는 자와 십못에 있는 자와 에스드모아에 있는 자와 라갈에 있는 자와 여라므엘 사람의 성읍들에 있는 자와 겐 사람의 성읍들에 있는 자와 홀마에 있는 자와 고라 산에 있는 자와 아닥에 있는 자와 헤브론에 있는 자에게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의 왕래하던 모든 곳에 보내었더라(사무엘상 30:21-30)

<설교>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은 공평하시다’는 말을 하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물론 기독교인들은 ‘그렇다’는 반응을 대다수 보이겠지만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현실을 보면 너무 차이나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태어나는 환경이나 살아가는 과정에서도 사람들마다 큰 차이를 보입니다.

서울에 가면 부호들이 밀집해 사는 아파트 뒤쪽에 판자촌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공평하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자 집에서 태어나 일하지 않아도 평생을 호의호식하면서 지내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뼈 빠지게 일하면서도 고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말하면서 ‘공평치 않다’고 말합니다. 또는 어떤 사람은 평생을 건강하게 사는 반면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질병으로 고생을 하는 것을 말하면서 ‘공평치 않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차이를 말하면서 ‘신은 공평치 않다’라고 반발하거나 아니면 ‘신은 존재치 않는다’는 식으로 신을 부정하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주장들의 한결같은 이유는 사람의 의지와는 무관한 채 주어진 환경과 조건들의 차별에 있습니다. 가령 태어날 때의 환경과 조건들은 사람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런 부분을 신의 영역으로 본다면 어떻게 사랑의 신이 이처럼 불공평하게 대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신이 존재하고 또한 공평하신 분이라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조건과 환경에서 태어나게 해서 그 사람의 노력과 성실 여부에 의해 열심히 한 사람은 잘 살게 되고 게으르고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못살게 되어야 그것이 신의 공평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세상은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열악하고 고통스러운 환경과 조건에 대해 분노하고 반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노가 신의 존재 자체까지 부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공평이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공정함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다’라고 말할 때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의 공평에 대해 아무런 의문이나 불만이 없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즉 여러분에게 주어진 환경과 조건들에 대해, 또는 하나님이 여러분께 하신 일들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나 부당하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인조차도 하나님의 공평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하고 적잖은 의문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정당한 분으로 변호하고 또 옹호하기 위해 하나님의 공평을 주장하는지도 모릅니다. 그 근거는 기독교안에 팽배한 사상이 ‘상급의 차등’이기 때문입니다.

상급의 차등은 예수 믿은 사람들은 동일하게 천국을 가지만 천국 내에서 대우 받는 것은 다르다는 주장입니다. 세상에 존재할 때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느냐에 의해 각기 차등이 있는 상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가 아닙니다. 성경은 오히려 상급에는 차등이 없음을 말합니다. 상의 차등을 말하는 것은 상을 미끼로 하여 교인들의 열심을 이끌어 내려는 사단적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천국은 말 그대로 공평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천국에서 각자의 행위에 따라 각기 다른 상을 받는다는 주장이야 말로 천국의 천국다움을 허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들의 여자와 자녀들을 포로로 끌고 간 아말렉을 치기 위해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쫓아가라고 하시자 군사들을 데리고 아말렉을 치게 됩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의 허락을 받는 과정이 아니라 전쟁 자체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묻는 것은 전쟁의 승리는 여호와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단순히 하나님의 결재를 받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소홀히 하거나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군사력과 전투력에 상관없이 승리는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가 싸우라’고 하신 것은 이미 군사의 수나 힘에 상관없이 승리했음을 뜻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9,10절에 “이에 다윗과 그와 함께한 육백 명이 가서 브솔 시내에 이르러는 뒤떨어진 자를 거기 머물렀으되 곧 피곤하여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는 이백인을 머물렀고 다윗은 사백인을 거느리고 쫓아가니라”는 구절을 보면 육백 명의 군사 중 이백 명이 피곤하여 기력이 없어 행군에서 뒤쳐지자 그들은 쉬게 하고 나머지 사백 명을 데리고 아말렉과의 전투에 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22절에 “다윗과 함께 갔던 자 중에 악한 자와 비류들이 다 가로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 사람의 처자만 주어서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는 내용을 보면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 중 악한 자와 비류들이 나서서 전쟁에 참가하지 않고 쉬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싸워서 얻은 전리품을 분배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싸우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처자만 데리고 가게 하라는 것입니다. 즉 전리품은 싸움에 참가한 우리들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악한 자들과 비류들의 생각과 사고방식이 곧 우리들의 사고방식 그대로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상급의 차등 역시 여기 등장하는 악한 자들과 비류들의 주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잘하면 잘한 것만큼, 못하면 못한 것만큼 다르게 보상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 잘하나 못하나 행한 사람이라 행하지 않은 사람이나 똑같은 것을 받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공평하지 못한 하나님이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왜 이러한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자기들의 힘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내가 힘써 싸워서 이 전리품들을 얻었으니 힘써 싸운 사람들이 서로 나누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피곤하다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잃어버린 처자를 찾아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처자만 주어서 데리고 떠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 다윗은 어떤 말을 합니까? 23-25절을 보면 “다윗이 가로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를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일반일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그 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이것이 다윗의 말입니다.

다윗은 승리를 자체를 자신들의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손에 붙이셨기 때문에 승리한 것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전리품은 우리의 힘으로 뺏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마치 내 힘으로 얻은 것처럼 싸움에 참여한 사람과 참여하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여 나눈다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같이 동일하게 분배하는 이것을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로 삼았다고 말합니다. 즉 대대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정신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탈취물을 유다 장로들에게도 선사합니다(26절). 결국 유다 장로들은 싸움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서도 탈취물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아닙니까? 구원은 우리가 싸워서 얻은 전리품이 아닙니다. 싸움은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전리품을 선사 받은 것뿐입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동일하게 분배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여기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여겼기에 동일하게 분배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이어져야 하는 것은 동일하게 분배하는 행위 자체만이 아니라 무엇이든 여호와께서 주셨다는 그 정신이어야 했습니다. 이 정신이 살아있을 때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답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상급의 차등을 말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공로를 주장하는 것이 될 뿐이며 이것은 교회의 본질 자체를 훼손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행위 자체를 잘 한 것과 잘못한 것으로 구분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말씀드리듯이 이것은 인간의 선악 지식에 의한 것일 뿐입니다.

신자는 성령이 임한 사람입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성령의 다스림과 보살핌을 도우심을 받고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이 간섭하시고 기도하시고 도우심으로 우리의 심령이 주님을 향하게 되고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만약 우리에게서 성령이 떠나신다면 그 순간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에게서 떠날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절대 자랑할 수 없습니다. 자랑하려거든 못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도우시고 지키시며 살피시는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 옳습니다.

신자에게서 뭔가 잘한 것처럼 보여지는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맺어지는 열매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나의 행위가 아니라 내 안에 함께 하시는 성령의 행위며 열매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행위에 의해 상급이 차등이 있다는 것은 내 안에 거주하시는 성령님까지 무시하는 주장이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보고 어떤 사람은 성경을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지 않는다고 해서 천국에 못가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신자로서 성경을 보는 것이 유익이 되고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때문에 신자로서 주님의 은혜를 깨달아가고 더욱 더 풍성한 은혜를 누리기 위해 부지런히 말씀을 대하고 묵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의로 여기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봤다는 것 때문에 천국에서 뭔가 다른 대우를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을 보면서 악을 행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보고 계신다면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성경을 볼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또 그만한 환경과 형편과 조건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면 됩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성경을 많이 보는 성도와 보지 못하는 성도가 만났을지라도 그러한 문제로 벽이 생기는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본문에서 다윗이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은 정신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포도원 품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절을 보면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천국을 어떤 장소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을 가리켜 천국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품군을 구하러 간 주인의 그 마음이 곧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보면 주인에 의해 포도원에서 일하게 된 품군은 각기 일한 시간으로 구분되어집니다. 이른 아침에 가서 일한 사람과 맨 나중에는 십일시(현재 시각으로 오후 5시)에 부름 받은 사람으로 구분됩니다. 그런데 주인은 일한 시간과는 상관없이 동일하게 품삯을 줍니다. 이에 대해 일찍 와서 더 많이 일한 사람들이 주인을 원망을 하게 됩니다. 사실 품군들에게는 한 데나리온 씩의 품삯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손해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늦게 와서 자기들과 똑같이 품삯을 받는 것으로 인해 마치 자신들이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의 입장에서는 늦게 와서 일한 사람에게 동일하게 품삯을 주는 것은 주인의 뜻일 뿐입니다. 이처럼 천국은 우리가 일한 시간과 양을 보고 그에 따라 차별하는 것이 아님을 이 비유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입니다. 다만 세상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에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으신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국을 소원하는 마음이라면 하나님의 공평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건강한 사람이든 건강치 못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가는 나라가 천국이며, 이 믿음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선물이기에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입니다.

물론 ‘그럼 믿음을 선물로 받지 못한 사람은 억울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은 공평치 못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차라리 모든 사람에게 믿음의 선택권을 주셔서 잘 믿은 사람을 골라서 천국에 보내시는 것이 공평으로 보여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스스로 믿음을 지킬 수 없기에 그렇게 되면 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탈락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지켜주시고 도와주시는 하나님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의 일한 것으로 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신자는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으로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받아야 할 만큼 잘한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일한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이와 다르게 대우 받아야 하고 더 받아야 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공평입니다.

교회는 서로 짐을 지는 곳입니다. 다윗은 피곤한 사람들은 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리품은 동일하게 분배합니다. 만약 전투에 군사력이 필요했다면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비록 피곤하다 할지라도 억지로라도 싸우게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힘으로 싸우는 전투가 아니었기에 피곤한 자는 쉬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의 힘으로 싸우는 아멜렉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13절에 보면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뉘게 속하였으며 어디로서냐 가로되 나는 애굽 소년이요 아말렉 사람의 종이더니 사흘 전에 병이 들매 주인이 나를 버렸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아말렉을 쫓던 다윗이 들에서 애굽 사람 하나를 만났는데 그는 병이 들어 아말렉 사람인 주인에게 버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즉 병이든 사람은 쓸모가 없기에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방식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사는 세상은 쓸모있는 사람과 쓸모없는 사람으로 구분됩니다. 그리고 행한 일에 대해 가치를 따지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부여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힘으로 존재합니다. 인간의 힘이 아니기에 인간의 행위와 조건을 보며 쓸모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구분할 수 없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공평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인간의 행위에 따른 차등 또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공평의 정신이 은석교회에 그대로 시행되어짐으로서 하나님의 공평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고 나타내는 교회로 존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참된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