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 삼상 2:27-30 존중히 여김

30절을 보면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신자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고 멸시하는 자는 경멸히 여긴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벼이 들어서는 안됩니다. 나와는 상관이 없는 말씀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천국을 소망하고 사는 신자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니 만큼 이 말씀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이라고 고백하고,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삶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절대적이며 반드시 이루어질 말씀에 대해 전혀 두려움이 없이 무시하는 듯한 태도로 살아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삶은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하고 그 어떤 세상 것이나 일에 대해서도 양보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만 우리의 삶을 보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 의해서 밀려나고 포기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따라가기보다는 내 욕심을 따라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솔직한 모습이고 또한 우리 스스로도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라면 본문의 말씀은 그야말로 우리를 긴장시키는 말씀이 아닐 수 없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는 하나님 역시 그를 경멸히 여기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이 농담으로, 우리를 겁주기 위해서 한번 해본 말로 여겨집니까? 아니면 ‘나는 절대로 하나님에게 경멸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라는 자신감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긴장됨이 있어야 하고 다시 한번 자신을 깊이 살펴볼 기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두고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도대체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은 무엇이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은 또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먼저 알아야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인데도 정작 자신은 존중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안타까운 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잘못된 존중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존중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중히 여기시는 복을 누리는 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문제를 교회와 연관지어 생각하기도 하고, 또는 자신의 도덕적인 착한 행동과 연관짓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존중하기 때문에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것이 곧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섬기는 것을 헌금이나 봉사로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 역시 하나님을 대신하기 위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교회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했다는 것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이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거룩한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마치 교회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을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교회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교회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으며, 그들을 한 몸으로 즉 교회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때도 역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에게 남겨진 것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 아담으로서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됩니다.

말씀으로 창조된 피조물의 가장 피조물다운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진심으로 창조주로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으로 드러나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면서 복종할만하면 복종하고 그렇지 않으면 거부하고 피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말씀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면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일했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게 합니까?’라는 불평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행동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은 별개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보면서 하실일을 결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한 것이 있으면 편하게 살게 해주고, 열심히 하지 않으면 그 대가로 고생을 시키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에 대하여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모른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분으로 계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전 생애를 하나님을 위해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선지자 사도들이 과연 그들의 행위로 인해서 세상의 편함을 누린 적이 있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으로 인해서 애매한 고통과 고난을 당한 것이 그들이 아니었습니까? 그처럼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증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행함은 세상의 복과 연결 지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결국 성경을 덮어 버린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한대로만 살아가면 됩니다. 말씀앞에서 ‘그렇게 하면 나에게 어떤 복이 주어집니까?’라는 불순한 생각은 버리고 말씀으로 지어진 피조물이기에 말씀의 다스림을 받아 사는 것이 나의 본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전도서에 보면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말씀을 합니다. 이것은 분명 솔로몬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입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을 세워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이러한 말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 말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말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그러한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의 말이라면 얼마든지 우리의 생각에 의해서 거부할 것은 거부하고 받을 것은 받을 자유가 있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를 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헛되다고 했으면 헛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내가 볼 때는 헛되지 않은데, 귀하고 가치있는 것이 많은데 왜 하나님은 이렇게 좋은 세상을 헛되다고 하는가?’라는 반발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나서 ‘너희들 마음에 맞으면 받아들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무조건 순종하라’를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높으신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내 자신을 사랑하며 나를 중심하기 때문에 우리의 판단은 선한 것이 될 수 없으며 옳은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헛되다’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헛된 것으로 보고 살아가는 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고 이것이 곧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 됩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감추시고 두루도는 화염검으로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인간은 스스로 생명으로 나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의 착한 일과 교회에서의 봉사 등등의 공로로 생명에 도달하고 상도 얻어보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잘하는데 이런 나를 천국보내고 상주시지 않겠는가?’라는 기대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기대가 곧 자신의 올무가 되어서 멸망으로 이끌어 갈 수 있음을 생각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을 말하면서도 성경을 덮어버린 것은 스스로 눈을 감아버린 것과 같습니다. 소경으로서 어떻게 제대로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아무쪼록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각을 이정표로 삼아 신앙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이정표로 삼아서 참된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있기를 바랍니다.

27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너희 조상의 집’은 엘리 가문이 속한 레위지파, 그중에서도 특히 제사장직을 위임 받은 아론의 가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이 말은 옛날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셨는데 그때 아론이 가문도 함께 구출되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으로 인해서 애굽의 종되었던 처지에서 구출된 그 은혜를 생각해 보라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너희는 지금 나의 은혜를 잊어버렸다’는 것을 책망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28절에서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내가 그를 택하여 나의 제사장을 삼아 그로 내 단에 올라 분향하며 내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자손의 드리는 모든 화제를 내가 네 조상의 집에 주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십니다. 구약시대에는 아무나 제사장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엘리의 조상인 아론의 가문에서만 제사장직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에봇을 입게 하셨는데, 에봇은 가슴에 우림과 둠밈이라는 것이 있는 제사장 복장으로서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입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아론의 가문을 특별히 제사장으로 삼아서 그들만이 하나님의 뜻을 물을 수 있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드리는 화제를 네 조상의 집에 주셨다는 것도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의 일부를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사람으로 세움을 입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을 이어가는 아론의 가문은 특별히 구별된 존재입니다. 하지만 제사장은 권력이 아니라 역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안에 제사장을 세움으로서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임을 보이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하나님이 자신이 가문을 제사장으로 세우신 그 뜻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스라엘은 먹지 못하는 제물의 일부를 자신들만 먹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들은 제사장 집안으로서 다른 이스라엘과는 다르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이라는 것을 권력으로 남용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엘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고 세상에서 이런 저런 형편과 환경에서 각기 살아가게 된 것에는 모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살다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에 의해서 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다만 소유한 것을 누리면서 내 배를 채우고 살찌우기 위해서 살기에 급급한다면 결국 그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엘리를 통해서 ‘너희 자신만을 생각하지 말고 너희들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신자다’는 것만 생각하고 말 것이 아니라 ‘나를 신자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소유한 것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힘으로 삼지 말고, ‘나는 누구의 은혜로 사는가?’ ‘나에게 주어진 이 모든 것이 어디로부터 주어진 것인가?’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우리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지 않도록 붙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몸이 편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기는데 하나님은 ‘너에게 그러한 복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왜 너를 특별히 그렇게 만드셨는가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찮은 일입니까? 그래서 성경보기를 싫어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주시고는 ‘누가 내 말을 존중히 여길래’라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세상에서 잘먹고 잘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끝까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붙드시는데 있습니다. 하늘을 소망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잘 알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보다 세상을 소망하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은혜는 필요 없다면 무시해 버릴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 서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면서 세상의 헛됨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세상의 헛됨을 볼 때 자신이 헛된 것을 추구하지 않고 하늘의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자로 되어진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보고 사는 신자인 것입니다.

29절을 보면 엘리는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겼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엘리의 책망을 대해보면 우리 역시 엘리와 다를 바 없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엘리가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며 살지 않습니까? 엘리는 자식을 더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제사와 제물을 멸시하는 그들의 죄를 그냥 넘겨버렸습니다. 아들들의 죄를 미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의 죄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사나 제물은 모두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멸시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죄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중히 여기는 엘리 자신의 죄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죄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네 자식을 버리고 하면 아마 ‘하나님 어떻게 내 자식을 버릴 수 있습니까?’라고 반발할 것입니다. 자식을 버린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식이 곧 자기 보람인데 자기 보람을 버리라는 말에 곱게 순종하겠습니까? 결국 하나님보다는 내가 중하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식을 바치라는 명령에 그대로 순종합니다. 이것으로 아브라함에게는 자식보다 하나님이 더 크신 분이었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에게는 하나님보다 내가 중하고 내 자식이 더 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버렸으면 버렸지 나 자신을 버릴 수 없고 내 자식도 버릴 수 없다는 고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죄를 깨닫고 죄에 대해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볼 수 있을 때 그 죄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보게 되었을 때 내 자신을 위한 삶보다는 나를 살리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찾기보다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존중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결론은 하나님을 존중하는 자로 살아 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보고 그 죄를 미워하는 것으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죄인일 수밖에 없는 모든 인생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없는 인생은 헛된 인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말들이 세상을 사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인된 내가 생명을 얻는데는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헛된 것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희망이신 예수님을 좇아가는 인생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죄를 보면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나를 구원하신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의 중심에 깊어질 때 우린 ‘내 인생에서 유일한 희망은 예수님이다’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신자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