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강) 삼상 31:1-13 사울의 죽음

<본문>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 아들들을 쫓아 미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 미치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를 인하여 중상한지라 그가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 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병기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병기 든 자가 사울의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사울과 그 세 아들과 병기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골짜기 저편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요단 건너편에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도망한 것과 사울과 그 아들들의 죽었음을 보고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러 거기 거하니라 그 이튿날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왔다가 사울과 그 세 아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을 보고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의 땅 사방에 보내고 그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의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모든 장사가 일어나 밤새도록 가서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취하여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와서 거기서 불사르고 그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나무 아래 장사하고 칠 일을 금식하였더라(사무엘상 31:1-13)

<설교>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다윗의 공평의 정신은 교회의 중심 사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문제가 아니고 윤리적인 문제도 아니며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신자들에게서는 자연스럽게 발산되고 증거 되어져야 할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은 참으로 공평합니다. 비록 모든 사람을 같은 상황과 형편과 환경에서 살게 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세상에 주어진 조건에 따라 은혜와 사랑을 달리 베푸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택의 법칙에 따라 사랑할 자와 미워할 자를 구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영원한 생명을 기준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기준으로 바라보는 습관을 버리지를 못합니다. 때문에 타인에게 주어진 것과 그것을 누리며 사는 그들의 삶의 풍요를 바라보면서 은연중 하나님의 불공평을 느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까지 우리에게 베푸신 영원한 생명에 대해 감사하고 그 생명을 귀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세상에 취해있고 세상을 삶의 전부로 인식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평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공평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야 말로 신자의 본분임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공평의 정신이 사라지고 훼손된 교회라면 교회라 말할 수 없음을 잊지 마시고 하나님의 공평이 여러분을 통해서 증거 되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공평의 정신이 살아있는 교회라면 비교, 경쟁, 자랑, 이러한 모습은 결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공평으로 베풀어진 사랑과 자비에 대한 자랑과 감사와 나눔만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울이 전쟁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이처럼 사울의 죽음으로 사무엘상이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사무엘하에서는 하나님이 선택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하나님께 구해서 있게 된 왕입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구한 것은 이방 나라의 통치 체제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막연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능력 있는 인간이 자신들을 위해 일해 주는 것이 더 믿음이 갔던 것입니다. 결국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역할은 능력이 있는 사람을 하나 골라서 왕으로 세워주는 것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왕이 아니라 왕을 세워주는 역할로 여겨버린 것입니다.

예전에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내용을 말씀드리면서 언급한 바가 있지만 현대 교회가 취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형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하나님이시듯 교회의 왕도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하나님이시듯 교회의 지도자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현대 교회가 과연 ‘우리의 지도자는 하나님이시다’는 인식을 가지고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현대 교회는 갈수록 이러한 믿음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대다수가 하나님이 지도자가 아니라 목사가 교회의 지도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하나님을 지도자라고 부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를 위해 능력이 있는 목사를 세워주는 역할로서의 지도자일 뿐이고 실제 교회를 책임지고 이끌어 나가는 지도자는 목사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 왕정 시대 때의 ‘상왕’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왕’이란 임금이 생존해 있으면서 왕위를 다음 임금에게 물려주었을 때 물러난 임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때 실권은 모두 물려받은 왕에게 있습니다. 물론 명분상으로는 상왕이 왕보다 한 수 위입니다. 그러나 단지 이름 상으로만 왕보다 위에 있는 존재로 높임 받을 뿐 모든 실권은 왕에게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지도자라고 일컫는 것이 마치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름상으로만 지도자로 여길 뿐 실제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은 목사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교회 역시 그것을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머리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행하는 것을 보면 몸이 머리로부터 분리되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머리 대신 자신들의 마음에 드는 다른 머리를 세워서 그 머리의 지시를 받으며 자신들을 발전시키고 지키려고 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사람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목사라고 해서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단지 교회를 위해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라고 세워진 존재일 뿐입니다. 절대로 교회를 책임질 사람으로 세운 것이 아니고, 교인들이 의지하고 따르고 복종해야 할 존재로 세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현대교회는 목사 한 사람만 잘 세우면 마치 교회가 성공될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점은 교회의 외적인 팽창을 성공으로 인식하는데 있습니다. 때문에 성공을 위해 능력 있는 목사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왕을 구한 이스라엘의 심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자기들을 다스려야겠다는 것입니다. 이방 나라가 그렇게 해서 잘살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믿으며 막연하게 바라보면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보다는 누군가의 명령과 지시를 받으면서 움직이는 것이 더 사는 것 같고 뭔가 되어져 가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이것저것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고 해서 교회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두고 교회가 게으르다거나 죽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게으르다면 그것은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죽었다면 그것은 주님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의 모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에 대한 마음이 건재 한다면 그것은 분명 교회인 것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모두가 원하고 환영했던 왕입니다. 이들은 사울이 왕으로 세워질 당시만 해도 소망에 부풀어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마음에 쏙 드는 왕 같은 왕이 세워졌으니까 이제 자신들도 잘 살 수 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사울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이간이 세운 왕은 결국 하나님에 의해 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울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죽었다고 말합니다. 비록 본문을 보면 사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을 알 수 있지만 성경에서는 사울이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역대상 10:13-14절의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는 내용을 보면 분명 사울의 범죄함으로 하나님이 죽이신 것으로 말합니다. 즉 사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죽이신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울의 자살을 부추겼다는 뜻도 아니고 자살할 마음을 집어넣었다는 뜻도 아니라 자살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밀어 넣으신 것이고 자살하는 사울을 내어버려 두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사울의 죽음은 그가 여호와께 범죄한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살아있다고 해서 여호와께 범죄하지 않은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즉 사울의 죽음이 범죄의 결과라면 생존은 범죄하지 않은 결과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죽음과 생존을 가지고 그러한 구분을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어차피 죽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비록 지금은 생존하여 있다 할지라도 그 역시 죽음 안에 들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죽음 안에서 그 죽음이 잠시 유예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존의 의미입니다. 이처럼 영원히 이어지는 생존은 없기 때문에 생존의 시간적 차이가 있을 뿐 죽음 안에서 모든 인간은 동일한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사울의 죽음을 범죄의 결과로 보는 시각으로 인해서 현재 생존하여 있는 여러분은 사울의 범죄와 상관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여기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죽음이 범죄로 인한 것이라고 해서 여러분의 생존을 범죄에서 벗어나 있는 근거로 삼지를 말라는 것입니다.

분명 사울의 죽음은 범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지만 거듭 말하지만 우리 역시 모두 죽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나이 들어 늙어 죽었다고 해서 범죄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모든 인간의 죽음 안에 있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인간은 범죄 안에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울의 죽음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합니까? 사울의 죽음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고 용납하지 않으신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울의 범죄가 무엇인가를 봄으로서 하나님이 무엇에 대해 용납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시는가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복을 주셨다면 ‘우리도 복을 받기 위해 그 사람처럼 행하자’라고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용납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움으로써 신자된 우리 역시 그러한 삶의 길을 감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이야 말로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는 신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사울은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사울을 만날 것이니 그를 왕으로 세우라고 지시하신 결과로 왕의 자리에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울은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사울에게 주어진 역할이었습니다.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 앞에 하나님은 사울을 세워서 왕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의 나라는 결코 존속될 수 없음을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이 왕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죽지 않을 사람은 아닙니다. 때문에 사울이 왕이 되었기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보기 보다는 단지 그에게는 죽어야 할 역할이 주어진 것 뿐이라고 여기는 것이 타당합니다.

범죄하지 않을 자가 왕이 되어서 범죄하게 된 것도 아닙니다. 사울이 여호와께 범죄한 것은 악한 인간의 본성을 왕의 자리에서 그대로 드러낸 것뿐입니다. 만약 왕으로 세움 받지 않았다면 사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존의 여건에서 하나님께 범죄한 자로 살았을 것입니다. 범죄는 모든 인간의 주특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이런 일만 없었다면 범죄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무지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은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과 상황에서 끊임없이 범죄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타인의 실수와 범죄함에 대해 비판을 하고 심판하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본인에게 다른 사람과 같은 실수가 없다고 해서 마치 자신은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사람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도 그 사람과 같은 여건과 상황이 주어지면 나 역시 그와 같은 범죄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타인의 실수에 대해 비판하는 입장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신앙의 길을 가기 위해 권면하고 인도해주는 입장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애당초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왕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신데 굳이 왕을 약속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만드시기 위해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고 전달할 자로 왕을 세우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왕은 인간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사울을 보고 왕으로 환영한 것은 사울의 용모가 준수하고 그의 체격이 다른 사람보다 좋았기 때문입니다. 즉 외모적으로 자신들보다 뛰어난 것이 영웅과 같은 기상으로 보여진 것입니다. 이미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계시나 하나님의 뜻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번영과 발전만 관심거리일 뿐입니다.

사울 역시 이러한 백성들의 뜻에 부응해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전달하는 역할로서의 왕이 아니라 단지 국가의 발전을 위한 왕으로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전투에서 보기에 좋은 것들을 남겨 놓은 것입니다. 명복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서라지만 속마음은 좋은 것들을 없앤다는 것이 아깝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유익과 번영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왕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을 죽이심으로써 하나님이 인정치 않으시고 철저히 거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그가 병기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 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병기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라고 말합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 중상을 입게 됩니다. 이제 곧 블레셋에 포로로 잡힐 위기에 처한 사울은 할례 없는 자들의 손에 죽을 수 없다면서 병기든 자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병기 든 자가 사울의 말대로 하지를 못하자 스스로 자신을 찔러 죽은 것입니다.

사울의 이같은 행위는 어찌 보면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의 손에 죽을 수 없다는 신앙적 자존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할례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존심을 세우겠다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울이 끝까지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을 생각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자의 신앙적 자존심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대로 살아가며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 신앙인의 자존심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믿고 있는 내용을 당당하고 떳떳하게 드러내는 것이야 말로 신앙인의 자존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명분, 내 이름, 내 체면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은 쓰레기와 같은 것일 뿐입니다.

사실 사울 역시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과 포부를 앞세우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것이 이방인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그러면서 ‘나는 할례 받은 사람이기에 너희들과는 다르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이방인의 조롱거리로 전락될 뿐입니다. 오늘 우리의 처지가 이러한 존재로 전락된 것은 아닌지 깊이 살펴봐야 할 문제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이 실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울을 보면서 우리를 실패로 이끌어 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시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역할로서의 왕이 아니라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이스라엘을 지키는 자로 존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울의 실패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책임지신다는 것을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실패의 길을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떤 경우에도 여러분의 왕이시고 여러분을 지키고 인도하시는 지도자는 하나님이신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인생을 여러분 스스로 책임지려고 하지 마시고, 능력 있다 여겨지는 사람을 의존하려고 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세운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보이지도 않는 분이 내 인생을 책임지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이 막연한 것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차라리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을 믿는 것이 더 안심이 되고 일도 다 잘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곧 여러분을 실패로 끌어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항상 여러분의 생각을 지키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확실히 하시고 그 무엇에도 여러분의 생각을 양보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비록 지금의 길이 어려움과 고통이 동반된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이 여러분의 지도자 되심에 의심을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역할은 고통과 어려움에서도 하나님을 나타내고 말씀을 보여주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지도자이시고 왕이십니다. 이런 면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보여주는 특별한 진열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에 실패한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지를 못하면 우리는 사울의 죽음의 본질과 그의 실패, 그리고 하나님이 사울을 거부하신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울은 약간 실수를 했거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모자랐거나 왕으로서 체통이 없다거나 친인척들이 부패와 비리에 연루되었기에 왕의 자리에서 잘린 것이 아닙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사명과 역할을 따라 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울이 자기 마음대로 번제를 드리는 것으로(13:9),아말렉의 왕 아각을 살려주는 것으로(15;9) 하나님의 뜻을 부인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이러한 사울에게 하나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말씀으로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합니다. 여러분이 부름 받고 지금의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나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나를 세우신 그 뜻에 따라 사는 것인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내 중심이 되면 안됩니다. 그것은 곧 실패의 길을 가는 결과가 될 뿐입니다. 나에게 좋은 것 내가 원하는 것을 생각하기 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지도자시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하나님만을 신뢰하십시오. 이렇게 사는 것이 성공의 인생입니다. 사울의 죽음은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