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 삼상 2:31-36 심판의 의미

신앙은 자신을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보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저에게는 ‘허공에 외치는 것이 아닌가?’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아무도 듣지 않고 관심 두지 않는 말을 그저 홀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신앙이 제대로 된 것이라면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이 있음으로 보여지는 모습입니다. 신앙은 절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외에 다른 것을 소망하거나 의지하지 않게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 외에 의지하는 다른 것을 치면서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께만 붙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내쪽에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행동이나 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된 자를 찾아오셔서 역사하신 결과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만을 말하고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것은 그래도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두게 되는 자가 있을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앙은 하나님 한분 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 믿고 다른 신은 안믿는다는 차원의 말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만 믿고 부처나 서낭당 같은 우상은 믿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외에 다른 것은 의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그렇게 살아갑니까?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 한분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신앙입니까?

엘리는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겼다고 책망을 받습니다. 즉 하나님보다 아들을 더 중히 여기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신앙이 있는자라고 말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기는 것이 있을 때에는 그것을 신앙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뭐 그렇게까지 심하게 하는가? 좀 적당히 하면 안되는가?’라는 불만이 있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기는 것이 존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엘리와 다를 바가 없음을 스스로 인정할 것입니다. 엘리가 하나님보다 아들을 더 중히 여겼다면 우리도 엘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과연 누가 아들보다 하나님을 더 중히 여기며 살아갈까요? 과연 이것은 우리에게는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수준의 신앙일까요? 인간에게 불가능한 수준의 신앙이라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삭을 바치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아브라함은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도 한때는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치사하고 연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기까지 하였다면 분명히 아들보다 하나님을 더 중히 여기는 신앙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일단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아들보다 하나님을 더 중히 여기는 그러한 신앙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소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엘리에게 말씀하신대로 하나님보다 아들을 더 중히 여기는 것을 신앙으로 간주하지 않고 아들보다도 하나님을 더 중히 여기는 신앙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소망이 있는지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그러한 소망이 아예 없다면 제가 지금 하나님만 신앙하기 위해서 말하는 이런 얘기들은 관심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항상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는 것은 자식에 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식의 건강 문제, 자식을 교육시키는 문제, 항상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서 걱정하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의 부모들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신앙하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고 걱정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자식의 신앙을 두고 걱정하기도 하겠지만 그것도 엄밀히 따져보면 다만 내 자식이 지옥가면 안된다는 자식 사랑에 나온 걱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자식의 신앙을 걱정하는 것도 잘못이니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우리의 신앙의 밑바닥에 과연 무엇이 있는가를 살펴보자는 의도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히 여기서 사랑하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하나하나 따져보면서 과연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말고 다른 것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싸움입니다. 내 중심에 있던 다른 것을 쫓아내고 하나님이 자리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앙을 주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시겠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믿는다’고 하는 우리의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속중심을 차지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속중심에 다른 것이 들어있을 때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쫓아내어 우리의 중심을 점령하시기 위해서 싸우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저를 세워서 이 말씀을 하게 하시는 것도 우리와 싸우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중히 여기는 것들이 결코 중한 것들이 아님을 알게 하시고 진심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는 싸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자이기 때문에 택한 자에게 구원을 베풀기 위해서 우리와 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승리하셨을 때 구원받은 자는 자신이 잃어버린 자였고 악한 자였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잃어버린 자였고 악한 자임을 깨달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볼 때 하나님보다 더 중한 분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심지어 사랑했던 자식도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은 죄인된 존재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살리실 하나님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원하는 자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다른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은 보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 원하는 자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온통 세상을 향해 있는 우리들의 마음으로서는 사실 하나님을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돈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면 원하겠는데 그동안 제가 외쳤던 것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상을 살아가는데 하나님을 불필요한 분으로 여기는 마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시기 위해서 오늘도 말씀으로 우리와 싸우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처음에 말씀드린대로 ‘과연 이 말씀에 관심둘 자가 누구인가?’라는 의문에 저에게 있지만, 저로서는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제 생각만으로 ‘말해도 관심없을거야’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말씀드리는 것이 저의 할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의 집을 위해 행하신 모든 일을 상기시켰습니다(2:27-28). 애굽에서 조상의 집을 구원하신 일, 그리고 조상의 집을 통해서 제사장 직을 이어가게 하신 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함을 선포하는 임무를 맡은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제사를 통해서 보여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제사장이 제사를 멸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는 제사를 멸시하는 아들들의 행위를 그냥 넘겨 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무시당하고 제사가 멸시를 받는 것보다 아들을 더 중히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엘리에게 하나님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30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존중히 여길 자가 못됩니다.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버림받아 마땅합니다. 그러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존중히 여김을 받는다면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에게 경멸히 여김을 받는다면 그것은 곧 멸망을 의미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시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31절에 보면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고 말씀합니다. 팔을 끊는다는 것은 힘을 끊는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젊어서 죽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한다는 것입니다. 젊어서 죽었기 때문에 노인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은 후에 있게 될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라는 표징으로서 홉니와 비느하스를 죽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34절에서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날에 죽으리니 그 둘의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새로운 제사장이 일어날 것이고(35절) 엘리의 후손들은 자기들을 대신해서 일어난 제사장을 의지해서 먹고 살아가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36절).

우리는 이 말씀들을 결코 가볍게 넘길 수는 없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못된 짓을 하다가 하나님께 심판 받아 망했다라고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들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고, 지금 하나님이 이 말씀으로 우리와 싸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로 돌이키기 위해서 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홉니와 비느하스를 한날에 죽게 하셔서 이 일이 표징이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과연 어떠한 표징을 말하는 것입니까? 죄지으면 이렇게 죽는다는 표징이겠습니까? 그런 표징이라면 사실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먹혀들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죄지어도 죽어나가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일처럼 사도 앞에서 거짓말만 해도 죽어나가는 일들이 계속되어진다면 죄짓는 것에 대해 겁을 먹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죄지어도 죽어나가지 않는 이 시대에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는다고 하는 것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표징입니까? 35절을 보면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과연 누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존재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인데 하나님에 의해서 죽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실 것인데 그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영구히 행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이것은 무엇이 죽는 것이고 무엇이 영구히 행하는 것인가를 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홉니와 비느하스를 죽임으로써 영원한 것이 있음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30절의 말씀은 영원한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존중히 여기신다는 것이 세상에서 귀한 존재로 만들어 주겠다는 뜻이라면 아마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존중이란 다만 예배드리고 헌금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중이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중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라는 뜻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를 영원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로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며 그것이 영원히 사는 길임을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영원한 것에 마음을 두고 살아갈 때 무엇이 중한 것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다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 마음은 천국에서 멀어져 있는 것이 우리일 수 있습니다. 관심 자체가 영원한 것보다는 세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마음을 영원한 것으로 돌리시기 위해서 엘리 집안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심판받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만을 중히 여겨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죽고 사라지는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음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죽고 사라집니다. 세상의 것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눈 앞의 자식이 중하게 여겨지겠지만 부모 자식의 관계도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세월이 지나면 부모 자식의 관계도 끝나는 것이고, 또 살아가면서 자식이 속을 썩일 때는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는 미움이 더 클 수도 있습니다. 자식을 믿는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자식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맡아 키운다는 마음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자식말고 돈말고 영원한 다른 것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한 분을 믿고 따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영원한 것에 관심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죽고 사라지는 세상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쓸모없는 인생이 무엇으로 존중히 여김을 받고 영원한 존재로 남을 것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신앙으로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모시도록 인도하십니다. 그것이 영원히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주님을 향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