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디모데전서 1:1-7  경계의 목적

 

<본문>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디모데전서 1:1-7)



<설교>

디모데전서는 디모데후서와 디도서를 포함하여 ‘목회서신’으로 분류된 성경입니다. 목회서신으로 분류한 것은 사도바울이 문제가 발생한 교회를 위하여 디모데를 남겨두고 그에게 교회의 교회다움을 위해 교회에 가르쳐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들이 무엇인가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를 목회하는데 필요한 내용을 말하고 있기에 ‘목회서신’으로 분류한 것입니다.


하지만 목회서신이라고 해서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은 아닙니다. 교회의 교회다움을 위해서 우리 모두가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내용이고 또 교회로 부름 받은 우리 모두가 경계로 삼아야 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면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라고 말합니다.


당시 바울이 로마에서 2년 동안 옥에 갇혔다가 석방된 후 디모데를 데리고 에베소까지 왔었지만 바울이 마게도냐로 떠나면서 디모데와 계속 동행하지 못하고 에베소에 남겨 두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에베소 교회에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거짓교사들의 미혹이 있었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한 모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바울이 신실한 동역자로 여기고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서 교회를 가르치고 그들을 바른 진리의 길로 인도하도록 하고자 한 것입니다.


다른 교훈이란 예수님이 오셔서 교훈한 내용이 아니란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교훈한 것은 복음입니다. 택한 백성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 가르치신 내용들이 그리스도의 교훈이며 그것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과 다른 교훈이 에베소 교회에 등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하지만 다른 그리스도를 전한 것입니다. 복음을 말하지만 복음의 본질이 달랐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교회에 있어서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함께 가던 디모데를 남겨서 에베소를 지도하고 가르치게 한 것입니다.


교회는 다른 교훈에 대해 경계를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말한다고 해서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그리스도를 말하지만 그리스도가 아니고, 복음을 말하지만 복음이 아닌 다른 교훈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면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신화라는 말을 들어 봤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화’ ‘로마 신화’라는 것이 있고, 2002년도 월드컵 경기에서 우리나라가 4강에 올랐을 때도 ‘4강 신화를 이루다’라는 말을 많이 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모 TV에서는 ‘신화창조를 이룬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이처럼 신화라는 말은 인간이 한 일 업적을 높여 부르는 것입니다.


끝없는 족보라는 것은 조상의 위대한 인물과 자신을 연결하여 자신의 위대함을 부각하고자 하는 것을 두고 말합니다. 즉 사람들이 족보에 착념하는 것은 나의 조상 중에 이처럼 위대한 인물이 있었음을 나타냄으로써 그 가문에 속한 자신의 위대성을 증거 하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서로 경쟁하며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더 위대한 가문인가를 따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없는 족보에 착념한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가문과 전통을 중시합니다. 구약의 인물을 두고 가상적 족보를 만들어 자신의 가문이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랍비들은 자신의 정통성과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자신의 스승의 족보까지 따집니다.


결국 신화와 족보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의 위대함에 빠져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이런 어리석음에 빠져 있었기에 교회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디모데를 남겨두고 그에게 참된 교회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서신을 보내 가르치는 것입니다.


신화와 족보에 착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위대함과 정통성을 주장하는 신화와 족보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툼과 변론만을 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의 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음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기에 구원받은 자가 증거하고 자랑할 것은 생명이 되는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에서 위대한 자로 높임 받는 모세의 직계 후손이라고 해도 모세가 자신의 후손의 죄를 씻어주고 생명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조차도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메시아를 기다려야 하는 죄인으로 죽었을 뿐입니다. 때문에 모세의 후손이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 역시 헛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흔히 교회가 몇 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자랑을 하기도 하는데, 그처럼 신화와 족보에 착념하는 것이야 말로 얼마나 쓸모없는 것을 붙들고 있는 어리석은 짓인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보다 좀 더 나은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자랑거리를 삼아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본성에 치우쳐 살아갑니다. 그런 자랑거리가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지 못한 채 내가 타인보다 좀 더 높으며 낫다는 만족감을 누리기 위해 끊임없이 신화와 족보에 착념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야 말로 교회가 버려야 할 것 중 하나이며 교회로서 전혀 무익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디모데를 남겨서 그런 것에 대해 경계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5절의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라는 구절을 보면 경계의 목적은 사랑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을 하든 사랑이라는 결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다 헛된 것이고 쓸모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여기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6-7절을 보면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말하는데, 다시 말해서 교회에 나타나고 맺어져야 하는 것은 사랑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여기에서 벗어나 오직 자신을 높이 세우고 자랑하기 위해 애를 쓸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랑은 보이지 않고 변론과 다툼만 보이게 된 것입니다.


율법의 선생이 되려고 하는 것도 사랑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선생은 율법을 가지고 남을 가르치고 판단하고 비판하기를 일삼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은 타인을 판단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책망을 받고 나의 죄인 됨을 발견하기 위함인 것을 알지 못하고 타인을 가르치려고만 한 것입니다.


신자가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가지 않을 때 나타나는 것은 변론과 다툼과 판단 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나타내고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룰 수 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자로 세움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부어주신 사랑의 실체를 자기 백성을 세워서 그 열매로 증거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 서로 모이게 하는 것인데 신자가 서로 모여서 자신을 높이고 자랑하는데 힘을 소모한다면 하나님의 경륜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위대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초라할 수밖에 없고, 내세울 것 없는 쓸모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자신을 잘 알았기에 우리가 볼 때 많은 일을 했으면서도 그것으로 자신을 높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든 일이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일 때 있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이름을 버리는 것입니다. 즉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관계로 모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모이는 교회입니다.


내가 오해 받고 자존심이 상하고 남보다 못난 자로 여겨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맺어지지 않고 다툼이 나는 것이 더 심각한 것입니다


내가 못난 자로 전락된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너진다고 해서 대신 그리스도가 세워진다면 나의 무너짐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우리에게 생생하게 살아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옳으심은 십자가로 나타납니다. 나의 옳음을 증명하려고 하지 말고 복음을 나타내고 복음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무엇이 세워지는가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사랑인지 아니면 무익한 변론이며 다툼인지 살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여러분은 날마다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나를 내세울만한 사람인가를 생각하시고, 못나고 보잘것없는 나를 세워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증거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잊지 마시고 쓸데없는 일에 힘을 소모하지 마시고 오직 그리스도가 세워지고 사랑이 맺어지는 길에 서서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