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디모데전서 1:8-11  선한 율법

 

<본문>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디모데전서 1:8-11)



<설교>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두고자 한 것은 에베소에 다른 교훈을 전하는 거짓 교시가 등장하여 교회에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지적하는 에베소 교회의 문제는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6,7절을 보면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한다는 지적을 합니다.


율법의 선생이 되려고 한다는 것은 율법으로 타인을 지적하고 가르치고자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맺어지는 것은 변론이며 다툼일 뿐이지 사랑은 아니기에 헛된 일에 불과할 뿐입니다.


8절을 보면 바울은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고 말합니다. 율법을 법 있게 쓰는 것은 율법의 용도, 율법의 목적에 맞게 쓰는 것을 뜻합니다. 그럴 때 율법은 참으로 선한 것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율법은 선한 것이기에 율법에 의해서 맺어지는 것은 선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악한 변론이나 다툼과 비판과 판단이 맺어진다면 그것은 율법을 법 있게 쓰지 못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나쁜 습관은 타인의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는 지적하고 책망하고 드러내야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수와 잘못은 감추고 싶어 하면서도 타인의 실수에 대해서는 드러내고 공격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이런 나쁜 습관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런 나쁜 습관에 의해서 선한 율법을 법 있게 쓰지를 못하고 내 자신이 율법의 선생이 되어 지적하고 파헤치면서 헛된 변론과 다툼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말씀을 도구 삼아 타인을 지적하고 다스리려고만 할 뿐, 정작 내 자신이 말씀에 의해 책망 받고 다스림 받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말씀의 다스림을 받으며 산다면, 항상 말씀에 의해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남을 비판하고 지적하고 판단하고 책망할 자격이 나에게 없음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처럼 다스림 받는 것이 없기에 항상 타인의 것만 파헤치는 데 열심을 내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말씀의 간섭을 받고 있는 흔적이 뭐겠습니까? 보지 않던 성경을 보게 되고, 안하던 기도를 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러한 것들이 전혀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무엇보다 분명하고 뚜렷한 증거는 자기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타인의 실수와 잘못만을 보던 눈이 자신의 실수와 잘못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타인을 책망하던 책망이 자신을 향하게 되는 것, 이것이 말씀의 간섭을 받고 있는 분명한 증거인 것입니다.


바울은 5절에서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경계의 목적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러한 경계의 목적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들이 과연 사랑이 맺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인가를 항상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9-10절을 보면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 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신자가 법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은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해 세운 것이 아니라 불법한 자, 복종치 않은 자, 경건치 않은 자 등, 즉 죄인들을 위해 세웠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악한 자, 죄인들을 위해 법이 세워졌다는 것은 그들을 심판하고 책망하기 위해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말미암아 자신의 악함을 깨닫고 회개하게 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옳은 사람 앞에서 법은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법 앞에서 자신은 옳은 사람으로 세우기를 즐겨하고 항상 자신의 옳음에 못미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페하지고 비판하는 용도로 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선생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중심을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을 세우기 위해 법이 주어진 것이지 잘못을 파헤치고 비난하기 위한 용도로 주어진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자신에게서 법으로 타인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이 보인다면 오히려 내 자신이 믿음에 있지 않고 말씀에 복종치 않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13:8-10절을 보면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는 것입니다. 이웃이 어렵다고 해서 도움을 주는 그런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 악을 행치 않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해 비판과 비난이 없는 것 자체가 사랑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보일 수 있는 것은 나 또한 비난의 대상인 그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악한 자임을 알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똑같은 본성과 속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누가 누구보다 덜하고 더할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아담의 후손으로서 동일한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서 끝없는 비판과 변론이 나는 이유는 이러한 자신의 악함은 전혀 보지를 못하고 타인만 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것은 십자가 앞에 자신을 세우고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됨으로써 가능합니다. 자신의 악함을 보지 못하고 십자가를 믿는 것은 단지 스스로 인정하는 믿음일 뿐, 진심으로 십자가에 선 경험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입에서 비판과 판단과 책망의 말이 서슴없이 튀어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말씀을 들으면서 말씀 안에서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연습하면서 힘써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 안에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날마다 생각하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에는 게을리 한 채 단지 복음에 대한 지식이 있고, 십자가에 대한 고백이 내 입술에 있다고 해서 마치 믿음에 옳은 사람인 것처럼 여긴다면 그것이야 말로 법을 법대로 쓰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법의 선함은 타인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법은 여러분을 옳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법에 의해서 자신의 옳음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자구적 시각에서 법을 바라보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법은 여러분 자신을 책망하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용서의 은총을 바라보게 합니다. 용서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한순간도 생명에 거할 수 없는 악한 모습을 바라보게 하면서 은혜와 긍휼에 감사함이 있게 합니다. 이처럼 은혜와 긍휼에 감사하는 자에게서 비판과 판단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 7:2절에서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여러분이 행한 비판은 타인을 향한 비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향한 예수님의 비판으로 되돌아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타인을 비판한다는 것은 자신은 옳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연 옳은 자인지를 타인에 대한 비판의 기준을 가지고 예수님이 비판하시고 헤아리신다는 것입니다.


11절에서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도가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인데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대신 저주 받으심으로 죄인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입었다는 소식입니다. 사도는 이 복음을 맡은 자이며 오늘 여러분이 이 복음을 맡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께 영광의 복음을 맡기신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영광의 복음을 좇아 살아가야 합니다. 복음의 지식을 가진 자로서 복음의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고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용서를 증거 하는 것이 여러분이 할 일이며 사명임을 생각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