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디모데전서 1:12-15  감사

 

<본문>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디모데전서 1:12-15)



<설교>

사도 바울은 8절에서 율법을 법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율법을 율법의 목적대로 쓴다면 율법으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책망하는 악한 모습이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허물과 불의함을 보게 되고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는 선함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 보면 율법을 법 있게 쓰지 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율법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잣대로 하여 타인을 판단하는데 더 빠른 것이 솔직한 우리의 현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설프게 알고 있는 율법으로 타인의 신앙을 간섭하고 가르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바울은 율법의 선생이 되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신자는 누구든 율법에 의해 가르침을 받고 살아가는 자이지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로 가르치는 권세를 가진 사람은 아닙니다. 성경을 전문으로 공부하고 설교하는 자의 위치에 있기에 목사를 ‘가르치는 자’로 여길 뿐, 실상 말씀에 대한 ‘선생’은 아닌 것입니다. 선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르치고 가르침 받는 관계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오직 하나님께만 받을 수 있는 사랑과 자비를 서로 나누는 관계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고 성령의 교제, 혹은 성령의 교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가르쳐 알게 하신 분은 성령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성령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알게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관계에서는 누군가를 가르치고자 하는 자가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성령으로부터 배우고 깨달아 알아가는 위치에서 만나고 교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선생은 없는 것인데 선생이 되고자 하는 자가 등장을 하는 것은 그가 성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면 바울은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는 말을 합니다. 즉 바울이 복음을 알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복음을 맡기셨기 때문이지 바울이 누군가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서 알게 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신자가 복음을 깨달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복음을 맡기신 결과입니다. 복음은 학문적 지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을 가르쳐서 알게 할 수 있는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이는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아무리 상세하게 복음에 대해 가르친다고 해도 그 가르침 때문에 복음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는 다만 복음의 내용을 전달할 뿐, 깨우쳐 알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기에 목사도 선생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에게 맡겨진 직분은 하나님이 맡기신 복음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역시 하나님이 여러분께 맡긴 복음을 전달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밭은 모든 자에게 주어진 직분인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12-13절)


바울은 주께서 자신에게 직분을 맡겼다는 말을 합니다. 바울의 직분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맡은 자라고 했습니다. 맡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에게 주어진 직분인 것입니다. 바울의 직분은 교회에서 안수하여 세운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주께서 맡기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결국 신자에게 있어서 참된 직분은 목사, 장로, 권사, 집사와 같은 것이 아니라 주께서 직접 여러분께 맡기신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깨달았다는 것은, 주께서 여러분께 복음을 맡겼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여러분께 복음을 맡긴 것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전하는 직분자로 세웠다는 것이 바울의 얘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직분 맡은 것을 가지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감사는 13절의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는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도무지 복음을 맡아 전할 자격이 없는 자신을 긍휼히 여겨 복음을 맡기신 것이 넘치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은 도저히 복음을 맡을 자격이 없는 자임을 말합니다. 복음에 대해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신이 복음을 맡게 되고 복음을 전하는 직분이 주어진 것은 전적으로 복음의 능력인 것이지 자신의 실력이 아니란 것입니다.


즉 자신이 옛날 복음을 핍박하던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개과천선하여 신학교에 들어가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해서 복음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고 그 지식을 가르치게 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복음의 능력이 자신을 붙들어 바른 진리로 이끌어 간 결과이며,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간 결과인 것이지 자신의 실력이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율법의 선생이 되고자 하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인가를 자신을 예로 들어 설명을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복음을 알게 된 것에 대한 감사함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알게 된 것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이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여 알게 된 지식의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우리의 지식과는 절대 별개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성경 내용일 뿐입니다. ‘아브라함 아들은 이삭이고, 야곱의 아들이 열두 명이다’는 식의 지식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으로는 천국 근처도 갈 수 없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은 주께서 맡기심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복음을 맡을 자격이나 있는 사람들이냐는 것입니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복음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는 포행자고 핍박자고 훼방자였을 뿐입니다. 그런 나에게 복음을 맡기셨다는 것이 놀라운 긍휼이고 은혜이며 그것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는 말을 함으로써 마지 자신이 긍휼을 입게 된 이유를 예전의 악행들이 복음을 알지 못하고 행한 것들이었기 때문인 것처럼 말합니다. 즉 모르고 한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봐준 것처럼 얘기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모르고 한 것이었기 때문에 봐준 것일까요? 그렇다면 ‘몰랐다’는 말은 면죄부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믿지 않던 모든 자들이 ‘몰라서 믿지 않았습니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몰랐다는 것이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이면서 창조주를 모른다는 것은 멸망의 죄일 뿐입니다.


바울이 주님을 핍박할 때는 그것이 믿음인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고 섬김인 줄 알았습니다. 또한 그 열심으로 바울 자신은 철저히 하나님께 속한 백성인 것으로 오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바울에게 도리어 긍휼을 입히심으로 그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악행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자신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도 없는 악행자였음을 말함으로써 복음에 있어서 자신을 선생으로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에서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이 어떤 자리에서 어떤 자리로까지 오게 되었는가를 깨달음으로써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은혜의 풍성, 사랑의 풍성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기도원에 가서 소리쳐 기도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가를 알게 되고, 그런 자신을 이 자리까지 오게 한 능력이 무엇인가를 깨달음으로써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이 우리의 열심도 노력의 결과도 아니라 복음의 능력이 긍휼을 입은 자를 붙들어 이끌어 간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누구라 할지라도 복음의 능력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바울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자신을 죄인의 괴수로 지칭하는 것은 그토록 자신은 복음을 맡을 사람이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복음이 주어지고 복음을 전하는 직분을 맡게 된 모든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기 때문이며 복음의 능력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란 바로 이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 믿으라’는 말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나됨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였습니까?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나오게 된 것,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감사함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실력이 아님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성도들 앞에서 아무 실력이 없는, 무능하고 연약하고 그저 불의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그런 성도로 설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여러분을 복음의 자리에 나오게 하신 은혜와 긍휼을, 그리고 복음의 능력을 증거하십시오. 그것이 바른 교훈이며 하나님의 영광된 복음을 좇는 것입니다.


신자가 복음을 알게 될 때, 나 같은 자가 복음을 알게 된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이며 풍성한 은혜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라고 해서 감사하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곧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게 됨으로써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께 이런 감사가 있습니까?


진노의 대상에 불과한 나 같은 자에게 하나님의 귀한 복음을 맡기시고 그 복음을 전하는 직분을 맡기셨다는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신자가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사랑과 은혜를 받고 있는지를 알 것이고 감사함이 넘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