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디모데전서 1:16-17  긍휼을 입은 까닭

 

<본문>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디모데전서 1:16-17)



<설교>

사람들은 세상이 악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세상이 악한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내가 피해를 입고 살아간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딸을 가진 부모는 항상 불안함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딸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이 악함으로 인해서 나같이 착한 사람이 피해를 입는다는 의식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이 왜 문제일까요? 그것은 세상이 악한 것이 곧 인간이 악하기 때문이고, 그 악한 인간 속에 자기 자신도 포함되어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악한 세상으로 인해 피해를 입고 살아간다는 의식만 있을 뿐, 악한 나로 인해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교회에 와서는 죄인이라고 순순히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 받았다고 말합니다. 과연 자신의 악함을 알지 못하는 죄인이 있을 수 있을까요? 내가 문제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자가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과연 참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우린 항상 그런 외식적인 고백으로 일삼으면서 ‘나는 죄인이다’고 고백하는 내가 믿음이 있지 않느냐는 생각으로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서도 내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타인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나 때문이다’가 아니라 ‘너 때문이다’는 의식만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습성입니다. 나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감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면, 자기 자신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인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문제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15절에서의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인해서 죄인 중의 괴수인 자신의 실상을 보게 됨으로써, 자신의 의와 착함으로는 천국 갈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이 전부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착함과 의로운 행위를 실천함으로써 천국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육에 속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온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시간이 남아서 심심해서 나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적당한 종교 하나 골라서 살아서는 복 받고 죽어서는 천국 가겠다는 욕심도 아니지 않습니까? 나의 죄를 알았기에 예수님의 은혜와 긍휼만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알았기에 예수님만을 의지하고 살겠다는 그 마음하나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은 은혜를 입었으니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이 주의 뜻이라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복음에 관심이 없고 교회만을 바라보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말에 불과할 뿐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인 자신의 실상을 알게 된 바울은 자신을 살리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을 증거하고 있을 뿐입니다. 16절의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바울의 말을 보십시오. 바울의 관심이 과연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입니까? 아니면 교회입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훼방자요 포행자요 핍박자였던 자신이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로 바뀌게 된 것은 긍휼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도 긍휼을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긍휼을 자신이 누리는 삶의 질에서 맛보려고 하지 않습니까? 전도하는 것, 즉 소위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그저 자신의 믿음이고 열심인 것으로만 여기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하나님이 나 같은 자에게 복음을 맡기시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로 삼으신 것에서 긍휼을 맛보고 감사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과 우리의 다른 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긍휼을 입은 것으로 인해 자랑할 것도, 내세울 것도, 증거 할 것도 긍휼밖에 없는 것, 이것이 긍휼의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이 긍휼을 입은 까닭을 얘기합니다. 이것으로 바울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도였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얘기할 때는 긍휼로 인해 자신이 누릴 혜택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나 긍휼 받았다. 나 천국 간다’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기 사랑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기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긍휼을 입은 자신에게 주어질 혜택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을 입히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참된 믿음으로 생각한다면, 오늘 우리가 믿음을 말하면서 진실 되고 참된 믿음에서 얼마나 멀어진 자로 살아가는가를 명백히 알 수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당신은 왜 항상 우리의 믿음에 시비를 거는가?’라는 반발이 있기도 하겠지만, 목사인 제가 할 일은 여러분에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참된 믿음, 진실 되고 생명이 되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증거 해야 하는 것이기에 바울로 인해서 증거 되는 진실 되고 참된 믿음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비해서 너무 다른 그러면서도 무엇이 다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는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대개 말하는 것은, 바울을 본받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에서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여기저기 다니면서 예수를 전했던 것, 즉 전도, 선교의 열심을 본받자는 것이 전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에 조금 열심을 내면 그것이 바울을 본받고 있는 줄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린 예수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였던 바울을 보면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고 우리의 믿음이 믿음이 아니었음을 깨달으므로 바울을 바울 되게 한 그 믿음으로 살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긍휼을 입은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 대해 오래 참으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즉 바울이 기도한 것 때문도 아니고 다른 사람보다 나아서도 아니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으로 인해 긍휼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바울에 대해 오래 참으심으로 긍휼을 입히셔서 ‘나의 구원은 나의 힘이 아니라 나에 대해 오래 참으신 그리스도의 긍휼로 인함이다’는 고백을 하게 하심으로 누가 믿음이 있는 자고 영생을 얻은 자인가를 증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에게 긍휼을 입히시고 바울을 세워서 ‘주님의 오래 참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긍휼을 입어 영생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고백과 감사함이 있는 자만이 천국 백성이라는 것을 증거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긍휼 앞에서 우리가 증거하고 자랑할 것은 오로지 오래 참으로 긍휼을 입히신 예수 그리스도일 뿐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긍휼을 입었음을 아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에 대해 오래 참으셨기 때문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진노에 자식에 불과할 뿐이었지만 진노로 대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심으로 대하셨기에 긍휼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오래 참으심에 감사한다면, 이 감사가 여러분께 있다면 여러분에게서도 오래 참음이 보이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즉 예수님이 나에게 오래 참으심이 형제에 대한 오래 참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생에 들어가는 그 날까지 하나님의 긍휼이 없이는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 하나 옳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신자라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아는 그 즐거움과 감사함만으로도, 긍휼과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만으로도 신앙생활은 무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감사고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17절을 보면 바울은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라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예전에 자기 열심으로 살았던 때에 없었던 찬송이 긍휼을 알게 됨으로써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베푸신 일에 대한 신자의 반응이며, 그것이 곧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야 누가 못하겠는가? 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바울은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을 알았기에 평생을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힘으로 믿으며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송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긍휼 은혜를 감사함이 있음을 뜻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송한다면 사실 신자는 하나님이 베푸신 긍휼과 사랑과 자비만으로 충만한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곧 신자에게는 충만이요 만족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지만, 이것은 결국 복음의 능력이고 긍휼이 입혀진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괴수에 불과한 바울을 찬송하는 자로 고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일이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은 인간의 것으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베푸신 일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깨닫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