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강) 디모데전서 1:18-20  선한 싸움

 

<본문>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 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디모데전서 1:18-20)



<설교>

고전 1:28-29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육체적 조건이라고 해도, 즉 문벌, 가문, 능력, 지혜 등등 세상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모든 것들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조건을 기준으로 자기 백성을 부르지 아니하셨고, 신자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기 때문입니다(고전1:30). 그래서 바울은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31절)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세상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으로 옷을 입고자 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번듯한 자로 보여주는 것을 인생의 한 재미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신자는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여기는 그리스도로 옷 입기를 소원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신자에게 인생의 즐거움이 되어 있을 때, 그를 행복하다고 일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 이런 즐거움과 기쁨이 상실되어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세상 속에서의 즐거움과 기쁨을 찾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일컫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예전에 입고 있던 육체의 모든 것들이 냄새나는 배설물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되자 남은 것은 죄 밖에 없는 자신의 실체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되었을 때, 사도 바울이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은 자신에게 입혀진 하나님의 긍휼이었던 것입니다. 죄인의 괴수에 불과한 자신에게 오래 참으신 하나님의 긍휼이 참으로 놀랍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7절에서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라고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넘치는 기쁨과 감사를 잃고 산다면 그는 신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신자라는 이름만 걸치고 교회를 왕래할 뿐, 신자의 맛은 알지 못한 상태일 뿐입니다. 신자가 신자의 맛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바울이 깨닫게 된 자신의 실체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자비와 은혜는 자신의 죄인 됨을 마음 속 깊이까지 발견한 자에게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다움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신자로 하여금 자신의 악함과 죄를 보게 함으로써 죄인에게 넘치는 긍휼을 보도록 도와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에서는 종교적 행위를 의로운 것으로 가르치며 사람들에게 의의 행위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교훈이며 교회는 교회의 교회됨을 위하여 이러한 다른 교훈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18절에서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선한 싸움이 바로 다른 교훈과의 싸움을 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좇기 위해서는 다른 교훈과의 싸움은 필히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19,20절을 보면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말하면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를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파선한 사람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를 훼방하지 말게 하기 위해 사단에게 내어 주었다는 말을 합니다. 사단에게 내어 주었다는 것을 교회에서 출교했다는 말로 이해해 본다면, 바울은 교회의 교회됨을 지키기 위해 교회가 용납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권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착한 양심은 세상이 칭찬하는 착한 행동을 하는 것이나 남을 속이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소망하게 되는 것은, 자신과 세상을 향한 눈이 뜨였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실체와 세상의 현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무지함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세상이 왜 악한가를 알게 하시고, 인간이 왜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를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자는 구원의 길이 되시고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착한 양심입니다. 이 양심을 버렸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소망하기 보다는 자신의 유익을 기준으로 하여 자기에게 힘이 된다고 여겨지는 것을 바라보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믿음이 파선된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께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아무리 관심을 두어도 그것이 돈이 되어 되돌아오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오로지 자기 유익에 파묻혀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 교회의 구별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세상이 관심두지 않은 예수님께 모든 관심과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세상이 가치 있다 여기는 것에 대해 헛된 것으로, 배설물과 같은 것으로 여기며 그리스도만이 영원함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자기 유익을 꾀하며 예수를 말한다면 그것은 진리도 아니고 생명도 아니며 세상과 똑같은 사고방식에 단지 예수라는 명칭만 삽입한 것일 뿐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다른 교훈이라고 말하며, 교회는 이와 같은 다른 교훈을 물리치는 선한 싸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디모데에게 당부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의 현실을 바르게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은 물론 말씀을 통해 가능합니다. 세상 현실이 제대로 보일 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시고 자기 백성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 덕분에 신자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현실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삽니다. 그것이 세상이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악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리스도를 말하고 모이면서도 그리스도의 은총을 입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는 생각지를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름으로, 그리스도께 나옴으로 자신에게 주어질 세상의 유익에 관심을 두고 있을 뿐, 정작 그리스도께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리스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멸망의 현실에서 구원된 자로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되어지는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날마다 수고하시고 기도하시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입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어도 내 인생에 별 도움이 안된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이야 말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사고방식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신자로 하여금 세상에서 좀 더 나은 환경과 형편을 위해 그리스도를 찾는 것 자체가 진리를 벗어난 것이며,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며, 다른 교훈이라는 것을 당부해야 합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당부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 싸움을 교회가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가 다른 교훈에 미혹되었기 때문일 뿐입니다.


교회가 진리 위에 세워져 있지 않으면 진리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 경계할 것도 싸워야 할 것도 없게 됩니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교회 부흥에 유익이 된다면 옳은 것으로 여기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보지 않고 교회를 바라보는 믿음에 파선된 모습인 것입니다.


진리는 사망에 처한 자를 건지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에 처한 것이 자신의 현실임을 깨달은 신자에게만 진리가 진리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교회 부흥을 위해서도 , 신자의 부를 위해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진리는 이방 종교에서 추구하는 것일 뿐, 성경은 그러한 진리를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죽은 자를 살리는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오신 것이지 교회의 부흥과 예수를 믿는 자의 부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를 살리는 진리가 아닌 교회 부흥과 믿는 자의 부를 위한 진리를 말한다면 그것이 다른 교훈인 것이고 교회는 그러한 다른 교훈에 대해서는 진리의 원수로 여기고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착한 양심으로 믿음의 길을 가는 교회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끊임없이 경계하고 싸워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닌 육체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로 나아가는 것에 쉽게 미혹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육체로 나아가는 것이야 말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보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만 말하는 것보다, 교회 부흥을 강조하고 부흥을 위해 힘을 쓰면 분명 눈에 보이는 성과가 보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여기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결국 한마디로 말해서 육체로 나아가는 것에서 믿음의 결과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마음에 두지 않고 교회로 모이게 되면 내가 곧 교회를 훼방하는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 스스로는 신자라는 이름으로 교회로 모이지만 실상은 내가 사단에게 내어 줌을 받아야 할 훼방자 일 수 있음을 명심하면서 스스로를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아닌 육체를 좇는 자, 즉 믿음에 하선한 자로 모인다면 결국 우리에게서 맺어지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서로 선생이 되려고 하는 분란 밖에 없을 것입니다. 신자로서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문제로 고민하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마음에 안든다는 불평, 누구누구가 어떻다는 비판을 하는 것만 있게 될 것입니다.


말씀에서 벗어나지 아니하고 말씀 위에 서 있는 것만이 교회입니다. 물론 모든 교회가 말씀을 강조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씀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지 교회를 바라보게 하고 육체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바라보게 하는 모든 것에 대해 경계하고 싸우며 살아가는 것이 신자이며 교회인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싸움이며 이러한 싸움이 없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소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과 타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