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 디모데전서 2:1-4  기도의 이유

 

<본문>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을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디모데전서 2:1-4)



<설교>

본문은 기도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단순히 기도라고 말하지 않고 간구, 기도, 도고, 감사로 언급하는 것은 기도의 종류, 즉 신자가 해야 할 여러 가지 기도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하는 모든 기도를 말하기 위함인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기준으로 해서 신자의 기도를 ‘이것은 간구, 이것은 기도, 이것은 도고, 이것은 감사’라는 식으로 구분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신자의 기도에는 그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면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앞의 내용과 본문이 계속 연결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왜 갑자기 기도에 대해 얘기하는지, 그리고 1절 이후의 내용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앞에서 바울이 언급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진리에 굳게 세우기 위해 디모데를 남겨 놓습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에는 문제가 있었는데, 그 문제는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한 자들로 인해 교회가 믿음으로 나는 사랑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변론만을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로가 자기의 믿음을 내어 놓으면서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을 높이며 자기 믿음의 옳음을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의 선생이 되려고만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베소 교회가 다른 교훈에 미혹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진리에서는 사랑이 맺어질 뿐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아닌 변론과 다툼이 맺어졌다면 그것은 진리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교훈으로부터 난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말하고 진리를 말하나 그것이 교회를 분쟁과 변론으로 신화와 족보에 착념하게 하는 것으로 끌어가는 것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처럼 진리와 다른 교훈은 맺어지는 것이 극명하게 다른 것입니다.



가령 교회가 ‘믿음은 교회의 일에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과연 그 말이 듣는 자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믿음을 언급하긴 하나 바라보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기에 진리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말은 오히려 교회 일에 봉사하는 자와 봉사하지 않는 자의 차별과 구별만 있게 할 것이고 결국 분쟁과 변론을 맺을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가르친다면 이 역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아니라 기도하는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 다른 사람의 기도와 경쟁하고 다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다른 교훈의 모습들입니다.



이러한 다른 교훈으로 인해 에베소 교회가 분쟁과 변론을 일삼는 헛된 말에 빠져 서로가 율법의 선생이 되려고만 하게 되었는데, 바울은 예전에 예수님에 대해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자신을 언급하며 오래 참으신 긍휼 때문에 복음을 알게 되었음을 말함으로써 성도의 관계에서 선생이란 있을 수 없음을 당부합니다.



즉 선생의 자리에 있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가를 전혀 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에 대해 오래 참으신 그리스도의 긍휼을 알지 못한 결과인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1절에서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여 기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너희도 기도할 때 모든 기도가 변론이나 다툼이나 분쟁을 만들어 내는 기도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는 기도 역시 믿음에서 나옴으로써 사랑이 맺어지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헛된 말에 빠진 기도는 변론과 다툼 밖에 맺어질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진리에 머물지 아니하면, 믿음의 모습으로 여기는 기도도 변론과 다툼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예배시간에 대표로 기도하면서 나를 욕하고 비판한 사람을 마음에 두고 ‘성도가 서로 욕하고 비판한 것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결국 나를 욕한 사람에게 ‘너 죄지었다’고 치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됨을 훼방하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2절의 말씀도 이런 방향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마치 신앙생활의 평안과 좋은 환경을 위해서 임금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본문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당시 임금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신자를 핍박했던 권력자들입니다. 만약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기독교를 핍박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하겠습니까? 하나님께 기독교를 핍박하는 대통령을 심판해 달라고 기도하거나 대통령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하나님을 믿게 해달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대통령을 위해 기도한다고 해도 그 이유는 대통령을 위해서가 아니라 기독교란 종교를 가지고 있는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이 임금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은, 나를 핍박하는 자조차도 원망과 미움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것을 당부하는 것입니다. 누구에 대해서도 원망과 판단과 미움으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 신자로서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핍박자에 대해서 ‘하나님 저 못된 임금을 빨리 심판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은, 그 마음에 원망과 미움을 담고 있는 것이고 기도라는 신앙행위를 이용하여 내 속의 미움과 원망을 담아내는, 즉 화풀이 하는 것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미움과 원망을 담고 있는 신자가 고요와 평안을 누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삼가야 할 기도가 뭔가 하면 소위 ‘국가와 대통령을 위한 기도회’라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가 대통령이 예수 믿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그것은 대통령이 신자 되었다는 것으로 다른 종교를 이겨서 기독교의 우월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대통령이 신자가 되면 마치 기독교가 국가를 다스리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대통령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헛된 말에 빠져 변론만 만들어 내는 기도인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복음화 시켜 달라는 기도에도 많은 사람이 속게 됩니다. 그러한 기도를 함으로써 마치 자신이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고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헛된 말일 뿐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온 세계를 복음화 시키겠다는 계획을 말씀한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면서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이 온 세상을 복음화 시키라는 사명을 맡기신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온 세상을 복음화 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택한 자를 구원하신다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결국 대한민국을 복음화 시켜 달라는 것이나 온 세계를 복음화 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라는 종교를 갖고 있는 자로서 기독교가 온 세계를 점령하여 기독교가 판치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헛된 말일 뿐인 것입니다. 사랑이 아니라 결국 변론과 다툼만 만들어 내는 기도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가 ‘하나님 우리 교회가 세상에서 구제에 제일가는 교회, 선교에 제일가는 교회가 되도록 축복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하지만, 이것 역시 하나님의 뜻은 철저히 외면한 채 인간의 욕망만 한껏 담아내는 기도 아닌 기도일 뿐입니다.



그런데 3-4절의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구절을 보면, 온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옳은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모든 사람’은 세상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의미는 임금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구절을 바탕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앞서 말한 대로 바울이 말하는 임금과 높은 사람은 당시 신자들에게는 핍박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은 하나님은 신자를 핍박하는 사람이든 누구든 구분하지 않고 하나님이 택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을 구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살인자든 누구든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신자가 기도할 때 나를 핍박한 사람, 나를 욕한 사람, 나를 비판한 사람, 이런 식으로 구분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사랑만 생각하고 담아내는  기도만이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라고 3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진리에 굳게 서 있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사랑과는 상관없는 내 것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신자가 신앙의 행위로 여기는 모든 것들이 결국 나를 내세우고 자랑하고 분별하고 싸우는 도구로 이용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으로 싸우고, 성경 읽는 것으로 다투고, 헌금으로 자신을 자랑하고 경쟁하고 복음의 지식으로 변론하고 판단하는 것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기도든, 설교든, 봉사든, 헌금이든 모든 것들은 서로 돕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힘이 되는 것으로 맺어져야 합니다. 즉 사랑으로 맺어지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으로 맺어져야 할 신앙의 행위들이 다툼과 경쟁과 변론만 만들어 내기에 바울이 이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기도의 이유는 사랑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기도에 담을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긍휼이지 결코 내 것을 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잊게 되면 결국 여러분의 기도는 사랑이 아니라 욕망과 다툼과 변론이 맺게 될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 욕하는 자, 비판하는 자, 누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그의 영혼의 유익과 구원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 기도가 여러분에게 고요하고 평안한 삶이 있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