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강) 디모데전서 2:5-7  중보자

 

<본문>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디모데전서 2:5-7)



<설교>

교회는 여러 사람의 모임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한분 하나님을 섬기는 관계이기 때문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같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고, 잘 난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가 부끄러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라는 것은 인간적 관계에서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본질을 가진 존재로서 같은 관계에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몸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부터 같은 은혜, 같은 생명을 받은 관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사람에 따라 차별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은혜를 차별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받은 은혜가 네가 받은 것보다 더 크다’는 싸움을 합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쉴 새 없이 벌어지고 있는 다툼이며 경쟁이고 자랑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은혜는 사람에 따라 차별적으로 주어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예수님으로부터 차별적 대우를 받아야 할 만큼,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할 만큼 나라는 존재가 더 낫지 못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 지난 시간에 여기서 말씀한 ‘모든 사람’이란 세상사람 모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이든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하나님이 부르시기로 작정한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사람이든 구원에 이르게 하시고 진리를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같은 은혜와 같은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부르십니다. 즉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같은 은혜와 같은 사랑 아래 있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은혜와 사랑이 오늘 여러분이 받은 은혜와 사랑보다 더 나은 것도 더 못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똑같은 은혜와 사랑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이겠습니까? 교회라는 관계에서는 어떤 차별도 구별도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가 차별되고 구별되어야 할 인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사망에 처한 처지이고, 똑같은 은혜와 사랑으로 사망에서 건짐 받았고, 똑같은 생명에 거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된 관계 안에서 분쟁과 다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서로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보지 못하고 마치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에 결국 서로 각자가 자신에게 있는 것을 내어 놓음으로서 다툼과 변론, 그리고 경쟁과 자랑이 끊임없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5절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왜 이런 말을 할까요? 에베소 교회가 하나님을 한분이 아닌 여럿으로 잘못알고 있었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 역시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아닌 다른 중보자도 있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한분이고 중보자도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한 것일까요?



그러나 하나님이 한분이시고, 중보자도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라는 것을 안다고 해서 그것을 신앙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야고보서 2:19절을 보면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말합니다. 즉 귀신조차도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믿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 중보도 한분이시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은, 에베소 교회에 있었던 문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문제는 다른 교훈과 신호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한 것으로 인한 변론과 다툼이며 서로 선생이 되고자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같은 진리를 믿는 신자의 관계가 증거 되지 못했으며 교회의 교회됨 역시 훼방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에베소 교회의 문제로 인해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둔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는 말을 한다면, 이는 에베소 교회에 있었던 문제와 연관된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말을 하는 것은, 교회란 한 분 하나님 아래 모이는 관계임을 당부하기 위함입니다. 한 분 하나님 아래 있는 관계이기에 분쟁과 다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여럿인 하나님으로부터 각기 다른 은혜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같은 사랑과 은혜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교회이기에 서로를 차별하고 구별하면서 다투고 분쟁하고 서로 선생이 되고자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을 보면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4절에서처럼 6절에서도 ‘모든 사람’을 언급합니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속전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속전으로 주셨다는 것은, 누구도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죄의 값인 사망에서 구출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사람이 자신을 죄 값으로, 즉 속전으로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희생으로 인해서 사망에서 구출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면 사망에 이를 수밖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함께 한 분 하나님을 믿으며, 한 분 중보자의 은혜 아래 모인다면 모두가 똑같은 죄인이라는 관계에서 모이는 것이고, 모두가 같은 은혜로 생명을 받은 자들이기에 자랑하고 내어 놓을만한 가치 있는 자신의 것이 별개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가치 있는 것을 내어 놓는다면 그것은 죄인인 자신을 사망에서 구출하시고 생명으로 옮긴 예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내어 놓는 것이 동일하기에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고, 이것을 두고 형제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에서 다툼과 변론과 경쟁과 자랑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은 한분이라는 의미를 모르는 것이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오셔야 하며, 중보자 역시 한분이라는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는 죄로서 이미 단절된 관계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사망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끊어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런 처지에 있습니다. 여기서 말한 ‘모든 사람’은 세상 전부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진 인간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모든 사람은 동일한 본질을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재주가 있고 힘이 있고 남보다 뛰어난 것처럼 여겨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국 사망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자리에서 본다면 잘났다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로 오셨습니다. 자신을 몸을 죄 값으로 사망에 내어 주심으로 단절된 관계에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만난 사람이라면 그리스도 앞에서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차별할 수도 구별할 수도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누군가보다 더 나은 존재로 본다면 그것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전의 은혜로 존재하고 있음을 무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신자는 다른 신앙을 보며 한심하다고 말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내가 곧 한심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누구든 내 마음에 들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도대체 내 마음에 들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슨 일을 한다고 해도 그 일이 내 마음이 들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발생하는 다툼의 많은 부분들이 서로가 내 마음에 들지 않음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기에 상대방의 일을 트집 잡게 되고 상대방은 또한 자신을 양보하지 않기에 다툼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이 어떠한가를 알아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로 사는 것이 중요하고, 나 또한 하나님 마음에 맞는 자로 살아가야 함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항상 주님으로부터 고침 받아야 할 형편없는 존재임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있는 고질적인 악함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 내가 누구인가를 잊지 않으면 되는데, 우린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십자가 앞에 서 있어야 할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항상 눈에 보이는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교회의 교회됨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7절을 보면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믿음과 진리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과 진리를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차별이 있다는 것은 믿음과 진리 안에서 모이고 있지 않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믿음과 진리 안에 사십니까? 한분 하나님, 한분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동일한 은혜 아래 있는 것이 교회임을 잊지 마십시오.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은혜는 모두에게 동일함을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