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 디모데전서 2:8-15  분노와 다툼이 없이

 

<본문>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디모데전서 2:8-15)



<설교>

6절에서 말씀한 대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속전으로 주셨습니다. 여기서 말한 모든 사람은 세상사람 전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신분과 형편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모든 사람’입니다. 즉 복음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모든 사람을 위해 주어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진리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진리 안에 있는 신자라면 사람을 차별하거나 판단하거나 비판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믿음과 진리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진리에 대해 모든 인간은 포행자요 핍박자요 훼방자일 뿐인데 사람을 차별하고 판단하며 자신을 옳은 자의 자리에 세워둘 만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불의함과 못남에도 불구하고 믿음과 진리를 알게 하신 은혜를 감사해야 하는 것이지 자신이 알고 있는 믿음과 진리의 내용을 가지고 타인을 판단하거나 차별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로 인해서 하늘의 복에 참여하게 된 것으로 깊이 감사한다면 모든 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에 대해서든, 즉 나를 핍박하고 힘들게 하고 원수 된 자 같은 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불쌍히 여겨주심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믿음과 진리 안에 거하고 있는 신자라는 것입니다.



‘내가 볼 때 저 사람이 어떻다’는 것은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볼 때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 갈 사람으로 보인다고 해서 그가 지옥 간다는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군가에 대해 ‘너 같은 자가 구원 받는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식으로 대한다면 결국 ‘모든 사람’이라는 범위를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위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신자에게서 타인에 대해 이와 같은 자신의 분노와 다툼으로 인해 그의 구원에 대한 것까지 내 스스로 판단해 버리는 실수가 종종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8절에서는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역할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섬김이 무엇이고 사랑이 무엇이며 은혜가 무엇인지를 증거 하는 자로 부름 받은 것이 신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이 어떠함을 나타낼 뿐이지 자신의 이름이 증거 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할 사람이 신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의 역할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까지 입니다. 그 이후의 결과는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자의 역할을 뛰어 넘게 될 때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결과가 보이지 않을 때 분노하게 되고 다툼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깨닫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분명 옳다고 여기는 결과를 위해 힘썼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믿음과 진리에 의해 세워지는 것이지 복음을 아는 누군가의 노력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소위 복음을 말하는 사람들이 실수하기 쉬운 것 중에 하나는, ‘교회는 이래야 한다’는 자기의 기준과 생각을 가지고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교회를 기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대가 무너질 때 분노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합니다. 기도는 인간의 모든 노력과 행함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기도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신자로서 복음을 증거하는 역할에만 충실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앞서 말한 대로 신자는 복음을 전하는 자일 뿐, 모든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신자로서의 역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자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다면 분노와 다툼은 일어나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뜻은 9절 이후의 내용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9절을 보면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은 단순히 사치하지 말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의 분노와 다툼이 무엇으로 일어나는가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여자들 사이에서는 옷과 장식품들이 자신을 보여주는 하나의 경쟁도구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옷과 장식품들이 타인의 것에 비해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겨질 때, 이기고 싶어 하는 인간 습성에 의해 분노가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옷과 장식품 등으로 경쟁하는 것이 곧 다툼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담한 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값진 옷과 장식품으로 자신을 보이려고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만 하라고 말합니다. 선행이란 그리스도를 좆는 것을 뜻합니다. 즉 그리스도를 좆는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신자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보이든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부름 받은 것은 남자든 여자든 이 역할을 위해서이기 때문에 남자는 남자의 자리에서, 여자는 여자의 자리에서 이 역할에 충실 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임을 말합니다.



11-14절에서는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들은 여자의 입장에서는 손해 보는듯한 느낌을 줄 수도 있고, 하나님이 여자보다 남자를 더 높이시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내용은 남자와 여자 중 누가 더 낫는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얘기 한 대로 역할입니다.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자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을 해서는  안되고 남자가 말하는 것은 다 들어야 한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자도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럼 바울은 어떤 의미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바울은 여자가 종용히 배워야 하고 남자를 주관할 수 없는 이유로 아담이 먼저 지음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아니라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역시 여자가 나중에 창조되었고 죄도 먼저 지었으니까 꼼짝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여자에게 자신의 본질을 잊지 말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남자에게 순종하라 가르치지 말라는 차원의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서 자신의 본질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남자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죄에 빠지기 쉬운 연약한 자가 곧 자신의 본질이라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본질을 생각한다면 연약한 자신이 남을 가르치고 주관할 힘도 자격도 없음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역할인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불려 나온 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면 분노와 다툼이 없이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 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서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을 하는 것도, 신자가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고 살아간다면, 즉 하나님이 부르신 신자의 역할과 본분에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해산을 통하여서도 자신의 죄인 됨을 생각하게 되고, 아이를 키우면서도 다툼과 경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의 믿음의 장래를 염려하면서 키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를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것이 되기에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결론적으로 하나님께 부름 받은 신자로서 또한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로서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나를 증거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 것으로 모든 것이 족하며 죄인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심으로 영생을 누리게 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나로 인해 증거되기를 소원하며 살아간다면 분노와 다툼은 자연히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 일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결국 분노와 다툼, 또한 경쟁과 분쟁, 이러한 모든 것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신자 된 자가 신자로서의 본분과 역할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앞세우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든 여자든 신자로서의 위치와 역할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 같은 자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로 살아가게 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헤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신자의 자리에서 신자로서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