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 디모데전서 3:1-7  감독의 직분

 

<본문>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디모데전서 3:1-7)



<설교>

조직체로서의 교회에 존재하는 직분은 계급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든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계급으로서의 직분이 아니라 봉사와 섬김으로서의 직분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봉사와 섬김의 역할로서의 직분이 아니라 은연중 계급으로 형성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는 분명 계급구조로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집사는 목사 말을 들어야 하고, 제직회는 당회 말을 들어야 하고, 당회가 결정하면 교회는 그대로 순종해야 하는 것이 없습니다. 간혹 교회 질서를 위해서 집사는 목사 말을 들어야 하고 제직회는 당회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등의 말을 하기도 하지만 교회의 질서는 상하복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질서이고 예수님이 질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살아가면 질서는 자연히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 20:28절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죄인이며 피조물의 섬김을 받는 것이 세상이 생각하는 질서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오히려 피조물을 섬기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섬김을 받아야 할 분이 섬기는 분으로 오신 것이 예수님이 보이신 질서였던 것입니다.



결국 질서의 무너짐은 어린 사람이 나이든 사람 말을 듣지 않거나, 집사가 목사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높은 자리에 있는 자로 여기고 섬김을 받고자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자신을 존귀한 자로 여기며 섬김을 받고자 하는 것, 장로가 자신을 어른이라고 하면서 섬김을 받고자 하는 것, 이 모두가 말씀의 질서가 무너진 것입니다.



바울은 3장에서 감독과 집사에 대해 말합니다. 감독은 오늘날 장로와 목사로 이해한다면 교회에서의 장로와 목사, 그리고 집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바울이 감독이나 집사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런 조건에 맞는 사람을 뽑아서 감독으로 집사로 세울 것을 가르치기 위해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에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른 교훈을 전하면서 에베소 교회 신자들의 신앙을 훼방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을 염두에 두고 감독이라는 것이 어떤 사람이며 집사가 어떤 사람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1절을 보면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는 말을 합니다.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가 선한 일을 사모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선한 일은 복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즉 감독의 직분을 얻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가 감독이라는 직분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한 일,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사모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복음을 위해 감독이라는 직분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든 장로든 그들이 목사라는 지위, 장로라는 지위를 누리고 그 지위를 이용하여 섬김을 받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선한 일을 사모하여 감독의 직분을 얻고자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목사가 아니고 감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28절의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는 내용을 보면 감독자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는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를 친다는 것은, 감독자가 교회를 다스리고 주관할 자격과 권한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이 흘리신 피의 은혜 안에서 믿음과 진리의 길로만 가는가를 살피는 역할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목사 역할인 것입니다.



목사는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 세움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는 자가 사모하는 선한 일은 분명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을 교회 부흥과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부터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를 세워서 크게 부흥시킴으로써 목사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의도로 목사의 직분을 얻고자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거짓교사로 나아가는 길임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즉 자신을 위해 목사라는 직분을 탐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복음이 전파되는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목사만이 아니라 모든 직분이 동일합니다. 선한 일을 사모함으로 직분을 얻고자 하는 것이 옳은 것이지 자신의 체면이나 명예, 자존심을 위해 직분을 얻고자 하는 것은 진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독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하기 위해 감독의 조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감독의 조건을 말함으로써 세상에는 감독의 자격이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에는 목사의 자격을 갖춘 목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목사의 자격은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찌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 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찌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찌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2-7절)입니다. 과연 이 조건을 갖춘 목사가 존재할까요?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이웃으로부터 책망 받을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회적으로 책망 받을만한 일이 없는 사람은 교회 밖에도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책망 받을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런 사람이 있겠습니까? 예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책망 받을 것 밖에 없음을 인정한다면 이것 하나만으로도 감독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단지 한 여자와 사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남자가 만약 간음을 한다면 몸은 한 집에서 생활한다고 해도 이미 한 아내의 남편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한 것으로 말씀합니다. 즉 마음에 음욕을 품는다면 그것은 이미 한 아내의 남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한 아내가 아닌 여러 여인을 두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음에 음욕을 품지 않는 자가 없기 때문에 결국 이것으로도 감독의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제와 근신과 아담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역시 이러한 조건에 맞는 감독도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한다는 것 역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그네란 약자입니다. 약자를 동정해서 도와주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대접할 사람은 없습니다. 대접한다는 것은 높임을 뜻하는 것인데 자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자인 나그네를 자신보다 존귀한 자로 높이고 대접할 수 있겠습니까? 즉 예수님이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시고 섬기시는 것과 같은 섬김과 대접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역시 인간으로부터는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가르치기를 잘하는 것은, 지식 전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독은 성경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것을 잘하기 위해서는 감독자부터 온전히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존재해야 하는데 온전히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있을까요?



술이란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존재합니다. 따라서 술을 즐기지 않는다는 것도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일을 즐기지 않음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술을 즐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 역시 우리가 갖출 수 없는 조건일 수밖에 없습니다.



구타는 약자에 대한 힘 있는 자의 폭력입니다. 굳이 주먹을 쓰지 않는다 해도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약자를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모든 것들이 구타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폭력성이 모든 인간에게 있음을 생각한다면 비록 누군가를 때리지 않았다고 해도 우리 역시 구타하는 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일에 관용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며, 다툼은 항상 경쟁하며 이기기 위해 살아가는 우리들의 일상 모습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돈을 사랑치 않아야 한다는 것도 돈 없는 인생을 생각도 하기 싫어하는 인간에게는 거리가 먼 얘기일 수밖에 없고, 장성하면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자녀들을 잘 다스려 복종케 할 힘도 없습니다.



새로 입교한 자도 말라는 것은, 새신자에게 감독을 맡기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교회에 갓 들어온 새신자에게 감독의 직분을 맡길 교회가 있겠습니까? 새로 입교한 자도 말라는 것은 그가 교만하여 질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즉 새로 입교한 자는 교회에서의 감독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함으로 교만하여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세우신 목사의 역할에만 충실하지 못하는 것이 교만이고 이들은 새로 입교한 자의 수준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목사의 역할에만 충실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임을 생각한다면 새로 입교한 자의 수준에 불과할 뿐인 자들이 목사의 자리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한다고 하지만 그리스도만을 증거 하는 감독이 외인에게서 선한 증거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바울이 말하는 감독의 자격들은, 앞서 말한 대로 ‘감독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독의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은 감독 자격이 없는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감독의 자격이 없습니다. 즉 누구도 목사의 자격이 없고 장로의 자격이 없고 집사의 자격이 없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모든 직분은 자신의 의를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얼마나 큰 은혜를 베푸시는가를 증거 하는 역할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독이 거짓교사와 비교되는 것입니다.



목사는 주님의 높으심만 증거 하는 사람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낮아질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증거 하는 것이 목사입니다. 참된 목자이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소망하는 것이 신자임을 증거 하는 것이 목사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신자로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