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강) 디모데전서 3:8-13  집사의 직분

 

<본문>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 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디모데전서 3:8-13)



<설교>

지난 시간에 감독의 직분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교회에서 직분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직분의 중요성을 교회에서 하는 일의 비중으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즉 목사는 가장 비중 있는 직분이고, 장로는 그 다음이고 권사 집사는 그 다음으로 생각하여 교회에서 목사가 가장 중요한 직분이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들이 결과적으로 직분에 차이를 두게 되고 귀한 직분, 덜 귀한 직분으로 구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말씀을 설교하고 교회를 감독하는 위치에 있으니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목사가 중요하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목사가 증거 하는 복음이 바른 복음일 때 복음으로 말미암아 목사를 존귀하게 여기는 것일 뿐이지 다른 직분과 차별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목사라는 직분이 높다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독의 조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조건에 맞는 감독을 세우라는 의미가 아니라 조건에 맞는 감독은 없음을 말함으로써 스스로 감독의 자격이 없는 자신을 돌아보게 하기 위함인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감독으로서 자신이 감독 자격이 없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자격 없는 존재임을 알 때 누구를 가르칠 자격도 없고 선생 될 자격도 없는 자신에게 하나님이 감독의 역할을 맡겼음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감독은 누군가를 다스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감독의 역할만을 생각하며 교회가 바른 진리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본문은 감독에 이어 집사에 대한 얘기입니다. 이런 사람을 집사로 세우라는 것인데, 이 역시 감독에 대한 내용과 마찬가지로 소위 집사의 위치에 있는 자를 향해서 ‘너희가 집사 자격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는 의미로 받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아무런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감독, 집사의 자격이 없는 자이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간혹 교회에서 집사를 세울 때 ‘나는 집사 될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한 가지 착각하는 것은 교회가 누군가를 집사로 세우는 것은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한 대로 자격이 있는 자를 세워야 한다면 은석 교회에는 감독도 장로도 집사도 없어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가 자격을 따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누구든 자격이 있는 분이 있다면, 그 분만이 자격을 따져 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자격이 없다면 누구에게도 자격에 대해 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장로의 자격이 있는가? 물을 수 없고, 집사의 자격이 있는가? 책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단지 목사로서 할 수 있는 말은 ‘장로의 역할은 이것이고 집사의 역할은 이것입니다’가 전부일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아무런 자격도 없는 우리를 세워서 뭘 하고자 하십니까? 우리가 맡은 역할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만 높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일곱 집사를 세웠는데, 그 이유는 구제로 인해서 다툼이 일어났고 그 일로 인해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않아서 집사를 세워 공궤하는 역할을 맡긴 것입니다. 즉 구제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목사 장로 집사가 존재하는 것은, 조직을 잘 이루어서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대개 보면 집사를 교회의 여러 가지 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집사에게는 교회의 여러 가지 일, 청소나 식사 당번 등의 번거로운 일들이 맡겨지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들을 맡아 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귀찮아서 집사의 역할을 맡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편함은 지키면서 교회를 다니겠다는 의도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극히 인간적인 사고방식에 의한 생각일 뿐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는 다만 교회를 다니는 것일 뿐, 교회로 말미암아 복음에 유익을 얻는 것은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과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수고와 희생이 우리에게 복을 안겨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항상 예수님의 수고와 희생으로 자신이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교회에서 자신의 편함을 지키고자 하겠습니까? 내가 편함을 누림으로 다른 사람이 고생하게 되고 번거롭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주님의 희생으로 살아가는 신자로서 정당한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쉽게 말하되, 십자가에 담겨 있는 예수님의 희생과 고난과 섬김의 혜택을 받고 살아가는 자로서 예수님을 고백하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흔적들이 묻어 나오는 것을 보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나 자신은 나의 편함을 위해 살아가기 바쁩니다. 나로 인해서 다른 누군가가 고생을 한다고 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이런 우리의 현실을 자각하신다면, 우리는 그러한 우리의 현실에서 다시금 정직하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앞서 말한 감독의 자격보다는 조금 완화된 듯한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열 가지를 갖추지 못하든 한 가지를 갖추지 못하든 자격 없는 것은 동일합니다.



8-10절을 보면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 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찌니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조건들도 인간적 기준에서 본다면 지킬 수 있을만한 것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단정하다’는 것을 외모의 단정함으로 이해한다면 그런 사람은 얼마든지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단정함으로 믿음의 단정함을 뜻합니다. 믿음이 단정하다는 것은 항상 낮아진 자리에서 자신의 높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서 수시로 나를 높이고자 하는 욕망이 일어나기에 단정함 역시 우리에게는 없는 모습인 것입니다.



일구이언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말 그대로 한 입으로 두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말입니다.



사실 사람은 주어지는 환경과 형편에 따라 말이 다릅니다. 환경이 좋고 편할 때에는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하나님만 믿고 살겠습니다’라고 하다가도 어려움과 고통의 환경으로 바뀌면 당장 감사가 원망과 불평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데, 높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높임 받기를 원한다면 그것까지도 더러운 이를 탐하는 욕망이라고 봐야 합니다. 결국 모든 사람이 더러운 이를 탐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11절에서는 여자에 대해 말합니다.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찌니라” 단 한 구절이지만 이 내용을 피할 수 있는 여자가 누구겠습니까?



여자는 먼저 선악과를 먹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을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여자 역시 자신의 높음을 즐거움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자랑에 다툼에 능합니다. 참소하는 일에도 부지런합니다. 절제를 하지 못하며 모든 일이 오직 주님을 위한 것으로만 드러나야 하는데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자로서 도무지 주님만을 위해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집사 역시 ‘내가 더 낫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잘난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너는 왜 이것 밖에 못하는가?’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없으며,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할 자격도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판단이 나를 판단하게 될 뿐입니다.



교회는 아무런 자격도 없는 자들이 모인 모임입니다. 그러한 모임에서 분쟁과 다툼과 선생이 되려고 하는 모습이 보여 진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자신을 보지 않는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 수고하든 중요한 것은, 아무 자격이 없는 나에게 그러한 역할을 맡기신 주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당회가 집사로 세운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세웠음을 생각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만 온전히 전파되고 증거되는 것인가로 고민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집사의 직분을 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집사가 모인 모임 안에서는 자연히 다툼이나 경쟁이나 쓸데없는 변론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주어진 역할입니다.



이 역할에 충실할 때 주님만 증거 되기 위해 낮아지게 되는 것이고 수고하고 고생하는 일에는 먼저 앞장 설 것이고 내 이득을 바라보기 보다는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주의 종이라는 아름다운 지위와 믿음에 담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집사가 무엇인가를 십자가 앞에서 깊이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