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강) 디모데전서 4:9-16  본이 되어라

 

<본문>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디모데전서 4:9-16)



<설교>

신자에게는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자신의 길을 정하고 그 길을 가기를 힘씁니다. 하나님께도 자신이 정한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애원합니다. 결국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길이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하나님이란 이름을 부르고 외친다고 해도 그것을 신앙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이 아닌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길을 내가 가야 할 길로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자의 기도는 하나님이 정하신 길에 순종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소원하는 것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관심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자신을 중심으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길에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디모데도 자신이 정한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가고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는 말씀을 하는데, 이것은 디모데로 하여금 다른 길을 가는 자들에게 무엇이 바른 길인가를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즉 디모데는 지금 자신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길을 가는 자들 때문에 하나님께 불려 나와서 이런 말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이것은 참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디모데는 지금 자신에게 득이 되는 일을 하는 자로 세움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타인의 득을 위해서 디모데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자신이 득을 얻기를 갈망합니다. 즉 자신을 위한 믿음으로만 생각할 뿐, 타인을 위한 믿음에 대해서는 전혀 도외시 해버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작정하신 누군가를 위해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라고 말씀합니다.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는 것은, 신자의 모든 것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도 행실도 사랑도 믿음도 정절도 믿음에서 나온 것이 됨으로써 믿음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의 말을 들으면서, 디모데의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을 보면서 바른 믿음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믿었더니 복 받았다’는 것을 보이는 것을 본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른 믿음, 진리의 길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것을 본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음을 선물로 받고 진리의 길을 가게 되었다면 그것은 믿는 자로 하여금 믿음의 본을 보이게 함으로써, 즉 믿음을 드러내게 함으로써 다른 자에게 믿음을 증거하고 가르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날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 역시 날 위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결국 신자의 사명은 믿음의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다’는 것을 증거 하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본을 보인다는 것을 착한 행동을 요구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을 착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믿음이 있는 자가 도덕적으로 악한 길을 갈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믿음은 신자를 악한 길로 가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도덕에 의해서 도덕적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믿음의 열매가 맺어지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본을 보이라는 것은 착한 행동을 하면서 살아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직 믿음의 정신으로 살아갈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그가 행하는 것 말하는 것 모두가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처지와 환경에서도 믿음에서 벗어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믿음의 행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 18:15절을 보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라는 말씀을 합니다. 형제를 얻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관계에서 지체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내가 형제를 얻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을 찾으심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린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마음은 잃어버린 자를 찾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자를 찾는 일에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형제를 대한다면, 모든 관심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을 드러내는 것에 집중되기 마련입니다. 말하는 것도 행실도 모든 것이 믿음을 보여주는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서로 믿음의 본을 보이는 관계로 모입니다. 믿음의 본을 보임으로써 서로 그리스도의 말씀에 굳게 서는 관계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신자는 날마다 무엇이 믿음인가를 살피면서 바른 진리의 길을 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시고자 한 자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시 디모데는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젊기 때문에 나이든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기 쉽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라는 말을 합니다. 무엇으로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까?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믿음의 본을 보임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신자의 권위는 나이에 있지 않습니다. 신자의 권위는 믿음의 본을 보이는 자로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의 본을 보이는 그가 진심으로 귀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믿음의 본을 보이는 자로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큰 유혹은 자신은 보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믿음만으로는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교회를 크게 만들고 싶어 하는 것도, 교회가 커야 세상이 자신을 인정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만 바라보는 믿음으로 산다고 해도 교회가 작으면 무시를 받는다는 잘 알기 때문에 교회를 키워서 자신을 높이고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이 하는 말은 ‘믿음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에 인간의 행함까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직 예수님만 계시면 된다는 생각에서 한참 멀어져 있는 것입니다.



13-15절을 보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올 때까지 읽는 것, 권하는 것,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예언의 말씀을 읽고, 예언의 말씀을 권하고, 예언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만 힘쓰라는 것입니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라는 말은 당시 안수를 줄 때에는 ‘그가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은사를 받았는가?’를 살폈습니다. 즉 예언의 말씀에만 관심이 있는가를 살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관심은 오직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나타내고 전하는 것에만 모든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교회를 바라봐서는 안됩니다. 교회를 바라보게 되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큰 건물이 보이고 많은 수의 교인이 보이고 교회의 많은 재정이 보일 뿐입니다.



목사는 말씀에만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교인들의 다른 관심에 동조해서는 안됩니다. 교인이 아무리 자신들의 관심거리에 함께 해줄 것을 요구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믿음의 본을 보여야 할 위치에 있음을 생각한다면 잘못된 관심에 동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는 말씀도 디모데의 속에 있는 은사대로 예언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권하는 일에 전심전력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모든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진보란 똑바로 나아가는 것, 발전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오로지 말씀을 향하여만 나아가는 그 모습만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죽든 살든 말씀만을 전하고 가르치고 권하는 자로만 존재하라는 것입니다.



16절에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는 말씀은 믿음의 본을 보이고 예언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이 일에 착념하여 살아갈 때 그것이 디모데 자신도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할 일은 믿음의 본을 보이는 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믿음인가를 살피고 그 믿음에만 거하며 살기를 소원하십시오. 여러분에게서 믿음의 본이 나타날 때 그 믿음은 하나님이 택한 자를 찾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