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강) 디모데전서 5:1-2  형제를 대할 때

 

<본문>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디모데전서 5:1-2)



<설교>

본문을 다시 보면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하고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하라”(1,2절)고 말합니다.



늙은이와 젊은이, 늙은 여자와 젊은 여자와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인데, 이것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마치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본문이 젊은 사람은 연로한 분을 아비처럼 공경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물론 신자는 연로한 분에 대해 공경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어른 공경은 무조건 떠받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약 성경이 그러한 예의범절을 가르치고 있다면 굳이 교회에 나올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도 예의범절은 잘 가르치고 있으니까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감동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렇다면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하며”라는 말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굳이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하며’라는 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성령의 감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길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어봐도 다들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은 문장의 뜻을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령과 상관없이도 문장의 뜻은 얼마든지 풀이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뜻과 생각과 마음입니다.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과 생각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에 감동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뜻과 마음과 생각을 담은 말씀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과 같은 내용에서 ‘예의범절’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성령과 상관없는 인간의 지식에 의한 이해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에 의해 말씀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말씀에서 예의범절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마음과 그 생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노인 공경, 또는 예의범절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의 관계 역시 우리에게 있는 윤리적인 시각으로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성도의 관계는 서로 싸움이 없고 친하게 지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친한 것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성도의 관계가 바르게 된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가 서로 친하게 지낸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성경이 말하는 형제 관계로는 이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이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 역시 세상의 친목 단체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모습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겨우 그런 것을 가르치려고 우리를 한 자리에 모이게 해서 말씀하고 계시겠습니까?



성도의 관계는 친분을 쌓고 유지하는 관계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관계는 작은 문제만 발생해도 금이 가고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겉으로는 친분을 쌓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자기 유익을 구하는 존재로 만나기 때문입니다.



먼저 성도의 관계부터 바르게 이해를 해야 합니다. 성도의 관계는 같은 교회를 다니는 모임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도의 관계는 주 안에서 주님에 의해 새롭게 된 관계를 의미합니다.



주 안에서 새롭게 된 관계란 무엇일까요? 마 12:48절에 보면 예수님은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에 대해서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세상에서 가장 가깝다고 하는 혈족관계를 무너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계는 혈족이라는 인간의 피를 중심으로 구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새로운 관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혈통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새롭게 된 관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기존의 가족 관계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족 관계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맺어진 새로운 관계가 영원하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서는 가문이나 집안에 대한 자랑이 허용이 안되는 것입니다. 모두 무너질 관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한다는 것은 자신의 뜻을 포기했음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뜻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뜻은 온통 악을 행하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아버지의 뜻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임을 알았을 때 가능합니다.



즉 내 뜻대로 되어지는 것은 나에게 악한 것이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되어지는 것이야말로 나를 살리는 것임을 앎으로써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뜻을 포기한다는 것은 나의 결단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한다는 것은, 함께 성령 안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들이 곧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가족은 인간의 뜻이나 생각 의지가 조금도 개입되지 않는 관계입니다. 창세전에 미리 아시고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인해서 형성된 관계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족으로 만나는 교회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은 자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성도를 대할 때는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나를 이 관계에 집어넣었다’는 것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가족관계로 몸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사랑과 은혜가 우리를 이러한 관계에 있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고 의지며 열심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관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러한 새로운 관계를 통해서 무엇을 하고자 하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성도의 관계를 통해서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단지 친하게 지내는 것으로 교회답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늙은 남자와 젊은 남자, 늙은 여자와 젊은 여자가 함께 모이게 하십니다. 그런데 늙은이와 젊은이는 사실 함께 하기가 어려운 관계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대차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못마땅해 하는 것입니다. 늙은이에게는 젊은이가 마음에 들지 않고, 젊은이에게는 늙은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이 곧 은혜와 사랑이 바탕이 된 관계가 아니란 것입니다. 물론 은혜와 사랑이 증거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어떤 관계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간섭받으며 살아가고 있음을 증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늙은이 젊은이가 함께한 교회라는 관계에서는 행동하는 것, 말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랑이라는 것은 친분관계가 아니라, 사랑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나타나는 사랑이 되어야 하고 불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은혜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불평이 나오고,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원망이 나온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바라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항상 나에게 있습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늙은이가 잘못하고 젊은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나를 살리신 은혜와 사랑을 바라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라는 것은 늙어서 힘없는 쓸모없는 존재로 보지 말고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귀한 하나님의 백성이며 주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누가 누구를 꾸짖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아비에게 하듯하라는 것은 늙은이를 그만큼 존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의해 났기 때문입니다.



늙은 자도 이런 마음으로 젊은이를 바라본다면 못마땅한 감정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을 입은 형제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하라는 것도 어미와 같이 존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난 새로운 생명이기에 존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는 누구든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세상은 힘으로 살아가기에 힘없는 자에 대해서는 함부로 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된 자를 업신여기며 함부로 대할 때 하나님이 복수하신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고 십자가의 은혜를 알며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안다면,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함께 한다면 그 관계에서 증거되는 것은 은혜와 사랑일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증거되는 것, 그것이 곧 성령으로 모이는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