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강) 디모데전서 5:3-12  참과부

 

<본문>

참 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받을 것이 없게 하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로서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 것이요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디모데전서 5:3-12)



<설교>

3절을 보면 “참 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과부를 경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교회는 과부를 경대해야 할까요? 그것은 과부를 경대함으로써 교회가 무엇인가를 세상에 증거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참 과부’라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참 과부’라는 말을 하는 것은, 과부이면서도 과부로 볼 수 없는 여인도 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과부는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사는 여인을 말합니다. 하지만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산다고 해서 모두를 과부로 여길 수 없다는 것이 ‘참 과부’라는 말을 하는 의도인 것입니다. 결국 사도가 말하는 과부란 단순히 남편과 사별한 여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5절을 보면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라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을 근거하여 생각해 본다면 사도가 말하는 참 과부는 ‘외로운 자’라는 답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외로운 자는 다 참 과부라는 것입니까? 남편과 사별하고 외로이 홀로 지내는 것이 사도가 말하는 참 과부인 것입니까? 사도는 그러한 조건적인 의미에서 참 과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롭다는 것은 누구든 느낄 수 있는 인간적 감정입니다. 남편이 있다고 해서 외롭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남편이 있어도 얼마든지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여인들이 아닙니까? 하지만 사도는 그처럼 인간적 감정과 느낌으로서의 외로움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가 말하는 외로운 자라는 것은 세상에 의지할 대상이 전혀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이나 친척, 친구 등의 인간관계가 전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러한 인간관계조차도 의지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참 과부는 의지할 대상이 전혀 없는 외로운 자를 일컫는 말이며, 성경은 이들을 가리켜서 ‘약자’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말하는 참 과부는 남편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과부’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신자에게 있어서 참된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신랑이라는 것을 단지 비유와 상징적인 의미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 이루어질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서 계속되어질 관계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에서의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육신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잠시 주어진 관계에 불과할 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참 과부는 세상에 의지할 것이 전혀 없는 자로 살아가는 여인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남편과 사별했다고 해도 세상에 의지할 것을 두고 산다면 그는 과부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 사도의 시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참 과부를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5절). 이것이 참 과부에게서만 볼 수 있는 귀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주야로 항상 기도와 간구를 한다는 것은, 세상에 의지할 것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의지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기도와 간구를 한다는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라보며 살아감을 뜻합니다.



따라서 세상에 의지할 것을 두고 사는 사람은 기도와 간구를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기도한다면 그것은 더 소유하고 싶어서 하나님을 찾는 수준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의지할 것이 없는 외로운 자라면 자연히 소망을 하나님께 둘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간절히 구할 뿐입니다. 이들이 바로 사도가 말하는 참 과부인 것입니다.



참 과부의 이러한 모습이 이 땅에 의지할 것을 많이 두고 살아가고, 또 의지할 것을 두기를 원하는 욕망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참 과부의 모습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세상의 것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을 책망하고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로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는 참 과부의 모습들이 세상의 것으로 염려하고 근심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을 책망하고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참 과부를 경대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시각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세상의 모든 것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도 세상이 아닌 다른 시각과 가치관으로 판단하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과 다른 시각과 가치관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교회만이 나타내고 증거 할 수 있는 독특한 모습을 상실한 채 단지 종교적 모임으로 전락해 버릴 뿐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기를 소원한다면 그는 항상 말씀에 의해서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예수님이 가신 길에서 벗어나 있는 우리의 현실을 낱낱이 파헤치고 책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자라면 그 책망을 기뻐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어둠의 길에서 끌어내어 빛의 길로 이끌어 가기 위해 책망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로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되는 것을 최고의 유익으로 여긴다면 그에게는 하나님이 세우신 모든 지체가 오직 경대할 대상으로만 보여지게 됩니다. 설사 자신을 미워하는 자라고 해도 그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은, 그러한 자를 통해서 나에게 깨닫게 하고자 하시는 유익이 있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세상에 의지할 것이 없이 하나님만을 소망하면서 날마다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참 과부가 있을 때 그를 통해서 깨닫게 되고 책망을 받게 되는 유익이 없겠습니까? 그러니 신자라면 자신의 잘못됨을 바라보게 하고, 자신의 믿음 없음을 알게 하는 커다란 유익을 끼치는 참 과부를 경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어떻다고 할 수 있습니까? 참 과부와 같은 지체가 있기를 원하지도 않고, 그러한 지체를 존귀히 여기지도 않고, 왜 참 과부와 같은 지체가 존귀한지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한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교회로부터 참 과부가 경대를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교회가 하나님을 소망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신자의 삶에 관심이 없음을 뜻합니다.



오히려 세상에 힘을 두고 있는 자들이 경대를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 그것은 교회가 힘을 가지고자 하는 욕망에 빠져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곧 스스로 교회 아님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교회에 외로운 참 과부를 있게 하신다면 그것을 그를 통해서 ‘네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아가느냐?’를 확인하시기 위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와서 유익을 얻는 것이 있습니까? 교회는 주일되면 성경책 가지고 와서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돌아가면 신앙생활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생활일 뿐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로 모이는 우리가 모두 함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마음에 두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자로 모인다면 서로에게 나타낼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 교회로서 서로에게 증거하고 나타낼 유익이 있기 마련인데 그 유익이 없다면 십자가와 멀어진 마음으로 다만 종교 단체로서의 교회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면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만한 것이니라”는 말에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단지 어려운 사람을 돕는 자선단체가 아닙니다. 세상이 교회에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유익이 아니라 단지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교회를 달리 말합니다.



만약 과부에게 자녀가 손자가 있거든 교회가 그 과부를 돕기 이전에 자녀나 손자로 하여금 효를 행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과부를 돕는다면 그 과부는 물질적인 면에서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효를 행하지 않는 자녀나 손자는 하나님 앞에 악한 자로 존재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효’는 유교적인 의미에서의 효가 아닙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해야 할 이유는 부모는 하나님이 세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즉 신자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모를 세우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순종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과부를 돕는 것보다는 자녀로 하여금 효를 행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 교회가 줄 수 있는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서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저 과부가 불쌍하니까 도와주자’라는 명목으로 구제를 해버린다면 결국 과부를 돌아보지 않는 자녀와 손자는 하나님 앞에서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로 방치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즉 무엇이 진정한 유익인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9-10절을 보면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로서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삶이 타인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과부의 명부에 올리라는 것입니다. 즉 이들이 참 과부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들을 구제함으로써 경대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구제는 불쌍하니까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경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젊은 과부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합니까? 11-12절을 보면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고 말합니다.



젊은 과부는 항상 자신의 인생을 고쳐볼 정욕으로 살아갑니다. 자기 인생을 위해 남편을 구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의 삶이 십자가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고쳐볼 생각으로 예수님을 찾는 것이 곧 젊은 과부와 같은 사고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거절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도 자신의 교회를 세상에 내 놓을만한 번듯한 교회로 만들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 역시 젊은 과부의 사고방식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임을 젊은 과부를 거절함으로써 증거해야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유익을 나누고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고 모여야 합니다. 하나님만 소망할 수밖에 없는 외로운 자로 모여야 합니다. 이러한 교회에서는 참 과부가 경대를 받게 됩니다. 오직 믿음이 존귀히 여김 받는 분위기가 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