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강) 디모데전서 5:11-16  젊은 과부

 

<본문>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 주고 교회로 짐지지 말게 하라 이는 참 과부를 도와 주게 하려 함이니라(디모데전서 5:11-16)



<설교>

신자는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다스림과 간섭을 받으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모습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홀로 살아갑니다. 간섭 받는 것이 없이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결정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홀로 살고자 하는 것이 현대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군가에게 간섭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간섭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어른이나 높은 자와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간섭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간섭 받는 것은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대인의 특징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하되 간섭은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는 나오되 자신의 세계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본문에서는 ‘젊은 과부’로 표현을 하여 말합니다. 과부는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사는 여인을 의미합니다. 남편이 없이 홀로 산다는 것은 말 그대로 간섭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말씀드린 ‘참 과부’는 다릅니다. 참 과부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기도를 열심히 하는 과부가 참되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의지할 것이 없이 하나님만 바라보는 과부가 참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힘이 없어서 막연하게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을 기대하고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시와 간섭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결국 참 과부는 육신은 의지할 남편이 없이 홀로된 존재를 뜻하는 것이지만 그 영혼은 여전히 하나님의 간섭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과부에게서는 어떤 모습이 보여지는가 하면, 10절에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것이요”라고 말씀하는 신앙의 모습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당시 남편이 없는 과부는 사회적 약자입니다. 지금은 여자가 홀로 산다고 해도 직장을 가지고 돈을 벌면서 살아갈 수 있지만 당시에 여자는 그런 위치에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여인에게 남편이 없다는 것 자체가 약자를 뜻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약자이면서도 나그네를 대접하고 환난 당한 자를 구제하고 선한 일을 좇으며 성도들의 발을 씻기는 섬김을 보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형편과 환경을 핑계 삼아 나그네를 대접하고 환난 당한 자를 구제하는 것 등을 자신의 소관이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형편과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과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하는 젊은 과부는 다릅니다. 과부는 과부이지만 참 과부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젊은 과부라고 하면 젊은 나이에 홀로된 여인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되겠지만 성경은 단순히 그런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지금 젊은 과부를 내세워서 어떤 사람이 구원 받은 자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11절에서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할 자는 젊은 과부와 같은 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젊은 과부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 시집가고자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과부가 결혼하다고 해서 잘못입니까? 과부가 결혼 했다고 해서 그것을 그리스도를 배반한 것으로 말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과부의 결혼 여부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목표로 살아가야 하는가?’입니다. 즉 젊은 과부의 결혼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목표가 아니라 자기 인생을 목표로 하고 살아가는 것은 구원 받은 자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인생을 목표로 하고 살아가게 되면, 항상 내 인생에 유리한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인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 유리하는가를 기준으로 선택하기에 설사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말씀을 거절하고 간섭을 뿌리치는 것이라고 해도 개의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젊은 과부를 거절하라는 것입니다.



13-14절을 보면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 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난 채 살아가는 젊의 과부의 삶이 결국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닌다고 하는데, 집집에 돌아다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돌아다니면서 망령된 폄론의 말을 하고 일만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망령된 폄론의 말은 인간이 좋아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타인을 비판하고 욕하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악함이 하나님에 의해 다스림을 받지 않기에 가는 곳곳마다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이것이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는 젊은 과부가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과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함께 한다면 그것은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젊은 과부가 모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과 지시를 받고 있는 참 과부가 모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간섭과 지시를 받으며 살아가는 신자의 모임에서 망령된 편론의 말이나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있겠습니까?



타인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비판과 판단을 받아야 할 자신을 보지 악한 것임을 생각하고 다스림을 받는다면 분명 비판과 판단은 삼가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신자의 모임인 것입니다.



결국 신자가 모인 자리에서 망령된 말과 폄론이 나타나지 않고 비판과 판단이 보이지 않고 예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모습이 있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간섭을 받고 있는 증거인 것입니다.



젊은 과부에 대해서 15절에서는 사단에게 돌아간 자라고까지 말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결혼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인생의 목표인가의 문제입니다. 인생의 목표를 자신에게 두고 사는 것이 곧 사단에 돌아간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간섭에 붙들려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과연 우리가 그러한 삶에 부지런합니까? 아니면 게으릅니까?



자신을 항상 말씀 두려고 해야 합니다. 신자는 이 일에 부지런해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만 말씀을 생각하는 척 할 것이 아니라 평소 살아가는 모든 삶이 말씀과의 관계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교회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흔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모여 찬송하고 말씀을 듣는 것을 보면 모두가 신자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교회 밖을 나가면 말씀과 상관없이 우리의 본래 습성대로 살아가버립니다. 그러면서 말씀의 간섭에서 벗어나 있는 자신에 대해 고민하지도 않고 근심하지도 않은 채 덤덤하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투성인 인간이 자기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 역시 귀한 줄을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언제나 인생을 자기 것으로 바라보면서 자신을 위해 자기에게 유리한 인생으로 끌어가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젊은 과부입니다.



하나님께 다스림 받는 것이 싫습니까? 싫을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이끄는 것이 내가 죽는 길인데 그것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우리의 본성이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다스려지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한 길에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 다스려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여러분이 깊은 마음으로 진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에서 기쁨과 감사를 맛보게 될 때 여러분의 삶에서는 참 과부의 모습이 증거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