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강) 디모데전서 5:17-20  복음이 귀하다면

 

<본문>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디모데전서 5:17-20)



<설교>

신자가 복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사망에 처한 나에게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소식을 가지고 찾아온 복음이 귀하지 않다면 그 사람은 아마 그리스도보다는 다른 관심에 붙들려 있다고 여겨도 될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에게 복음이 귀하다면 그 귀한 복음 때문에 나타나는 모습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신자는 자신이 진심으로 복음을 귀히 여기는 자인가를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복음을 귀하게 여긴다’는 자기 생각으로 쉽게 자신에 대한 결론을 내릴 것이 아니라 복음을 귀하여 여기는 것이 나의 마음이라면 그러한 나의 마음에 의해 나타나는 열매로써 자신이 진심으로 복음을 귀하게 여기는 자인가를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방향으로 생각해 봐야 할 내용입니다. 본문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목사에 대한 대우 문제로 이해하게 될 위험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이 장로에 대한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존경하고 보수를 지급하고 장로에 대한 송사를 함부로 하지 말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7절에서 말하는 ‘잘 다스리는 장로’는 지금으로는 목사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는 지금처럼 말씀을 전하고 치리하는 목사와 치리만을 하는 장로로 구분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장로, 즉 목사만 존재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라고 말합니다. 즉 잘 다스리는 목사를 배나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부흥시키고 성도들을 잘 관리하는 그런 목사를 존경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목사로서 교회를 잘 다스리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목사가 교회를 잘 다스리는 것은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 있도록 그리스도께로 인도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사의 역할입니다. 한마디로 목사는 이런 역할에만 충실할 때, 그래서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순종할 수 있도록 도울 때 잘 다스리는 장로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교회는 목사의 말에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와 목사가 그런 관계에 있다면,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 있는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말씀이 신자를 다스릴 수 있도록 처음부터 끝까지 내 이익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 있도록 그리스도가 누구시고 말씀이 무엇인가를 부지런히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교회는 자연히 말씀의 다스림을 받게 되는 것이고, 목사가 말씀을 전할 때 그 말씀에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 다스리는 장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장로를 배나 존경할 자로 알라는 것입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는 교회에서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자칫 목사가 목사의 일을 잘 하면 교회는 그 목사를 존경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초점은 목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있습니다. 즉 목사다운 목사를 존경하라는 말을 하려고 하기보다는 ‘진심으로 복음을 귀하게 여기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잘 다스리는 장로는 신자들에게 생명이신 그리스도만을 선포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귀히 여기는 신자에게 잘 다스리는 장로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자신에게 필요한 자이고 귀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귀하다기보다는 그가 하는 역할, 그리고 그가 하고 있는 일로 말미암아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그리스도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큰 도움을 얻기에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잘 다스리는 장로인데도 불구하고 존경을 받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본문의 내용대로 한다면 그 교회가 복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복음만을 증거하고 그리스도만을 전하고자 하는 목사 역시 귀하지 않는 것입니다.



18절에서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고 말하는 것도 단순히 목사에 대한 보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소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소가 없이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소가 귀하기에 소를 잘 관리하게 되는 것이 농사꾼인데 소를 이용하여 일을 하고자 하면서도 소가 먹을 것을 주지 않고 입에 망을 씌운다면 그 사람은 소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소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힘을 쓸 수 없고 소가 힘을 쓰지 못하면 농사일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소가 일하는 것이 자신에게 필요하고 없으면 안된다는 것을 안다면 소의 입에 망을 씌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내용 역시 목사의 보수 문제를 다룬다기보다는 복음에 대한 관심 여부를 다루는 내용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당시 말씀을 전하는 장로는 교회로부터 보수를 받았습니다. 교회가 장로의 생활을 책임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말씀을 전하는 장로에게 보수를 지급하면서 그 생활을 책임진 것도 말씀을 향한 관심과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고와와 과부를 돌아볼 것을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고아와 과부를 돕기 위한 목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은 자로 살아가는가를 확인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애굽에서 종 되었던 자신들을 구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가에 대한 증거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세우신 고아와 과부를 멸시치 않고 돕는 것으로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약한 자를 돕는다는 것은 자신의 약함을 바라본다는 것이고, 자신의 약함을 바라보는 것에서, 현재의 복이 모두 하나님으로 인한 것임을 생각하고 은혜에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세우신 고아와 과부가 멸시를 받고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증거이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서 쫓겨남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한 대로 잘 다스리는 장로를 배나 존경하라는 말씀도 이러한 흐름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보수를 받지를 못하고 생활에 곤란을 가져온다면 그것은 결국 교회가 복음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돈을 사랑하고 있는 흔적이라는 것입니다.



19절에서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라는 말씀도 장로는 범죄해도 교회가 함부로 송사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송사가 장로에 대한 감정적인 문제로 흘러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목사와 신자는 인간적 관계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 때문에 맺어진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워 목사를 송사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말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감정에 치우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목사에 대한 이 모든 내용은, 잘 다스리는 장로에 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목사가 말씀을 바르게 선포함으로써 신자로 하여금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일에 그 역할을 하지 않을 때, 다만 목사로서의 욕망을 앞세워 그리스도가 아닌 교회를 붙들고자 할 때 그러한 목사를 거절하는 것도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귀히 여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굳이 목사에 대한 얘기만이 아닙니다. 말씀이 귀하기에 말씀을 전하는 자를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교회에서 어떤 형제가 말씀에 순종하면서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교회는 그를 존경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분위기여야 합니다.



 돈 많은 사람이 교회에 많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분명 말씀이 아닌 돈을 사랑한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귀하게 여긴다면 자연히 믿음의 형제를 존귀히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말씀으로 모이는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