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강) 디모데전서 5:21-25  자신을 지키라

 

<본문>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며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디모데전서 5:21-25)



<설교>

신자는 복음을 귀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곧 생명임을 알기에 자연히 복음을 귀히 여길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귀하게 여기는 신자는 복음을 전하는 장로를 배나 존경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장로의 인품 때문이 아니라 복음 때문입니다. 즉 복음을 귀히 여긴다고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장로를 존경하지 않는다면 결국 복음이 귀하다는 것은 그저 자기 생각일 뿐이라는 것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야기의 중심은 장로, 즉 목사를 존경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는 과연 복음을 귀하게 여기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며”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천사들 앞에서 엄히 명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천사들을 빙자해서 엄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디모데가 누구인가를 강조하고자 하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천사는 세상에 속해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해있습니다. 따라서 사도가 하늘에 속한 분들 앞에서 엄히 명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 사도도 하늘에 속한 자로 명하는 것이고, 사도의 말을 듣는 디모데도 하늘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속한 자에게 명령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하늘에 속한 사람에게만 명령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아는 것처럼 하늘에 속한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다면 그것은 ‘너희들은 내게 속한 자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명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기 전에 우리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시는가에 대한 생각부터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명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21절 중간에 보면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며”라는 말을 합니다. 편견이나 편벽이라는 것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는 항상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특정한 인물이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인간관계에서 모든 사람들을 공평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습니까? 은석교회의 모든 신자들을 동일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취미나 성격, 사고방식 등등 여러 가지의 여건에 의해서 내 마음에 드는 특정한 사람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평소 활발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조용한 사람보다는 활발한 사람이 더 마음에 들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을 향한 사람의 마음은 자신이 선호하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편견이고 편벽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늘에 속한 사람에게는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에게 기준은 내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대하시는가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로 대하십니다. 긍휼과 자비로서 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 안에서 모든 사람은 동일합니다. 그의 성격이나 기질과 상관없이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합니다. 이런 마음이 있을 때 편견과 편벽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심으로 나를 용서하신 복음이 귀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복음이 귀함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용서를 안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용서를 진심으로 아는 신자라면 형제를 나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용서에 있는 자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에게서 편견과 편벽이 나온다면 그것은 곧 내가 복음을 귀히 여기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내용도 사람을 편견과 편벽으로 대하지 말 것을 실천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너희는 과연 복음을 귀히 여기는가?’를 묻는 말씀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드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이 곧 하나님의 용서 안에서 형제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복음을 귀히 여기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2절에서도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는 말씀을 하는데 이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안수하는 것은 직분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직분자를 세울 때 대개 무엇을 보게 될까요? 많은 목사들은 직분자를 세우고자 할 때 목사인 자신을 잘 도와줄 사람을 세우려고 하게 됩니다. 목사의 일에 방해가 되고 시비를 걸만한 사람은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 목사의 욕심입니다. 한마디로 내 편이 되어줄 사람, 교회 운영에 도움이 될 사람이 누구인가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에 관심이 없는 자들의 생각입니다.



복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직분자를 세우는 것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이라고 해도 복음을 사랑하는 자로서 복음의 모습을 증거 할 사람인가에 관심을 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복음을 향한 관심은 안수하는 일에서도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곧 경솔히 안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는 말씀도 과연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를 묻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에도 안수받기 위해서, 직분자 되기 위해서 다스리는 장로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것에 흔들리지 말고 하늘에 속한 자로서 오직 복음에만 관심을 두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는 말씀도 복음에 대한 관심과 연결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는 것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서 쉽게 보이는 것은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처럼 죄를 짓지 않았다’는 생각이 자신을 의로운 자의 자리에 세우게 되고 결국 ‘나는 너보다 낫다’는 정당성을 앞세운 채 타인의 죄에 대해 간섭하고 책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죄를 보지 않음으로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입술로는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죄는 보지 않는 외식적인 고백으로 일관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 속한 자는 자신의 주관자가 없습니다. 주관자가 따로 존재함으로써 주관자로부터 책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 책망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자신을 책망할 때는 항상 자기 합리화가 앞서게 됩니다. ‘이것은 잘못이다’라고 하면서도 그런 잘못을 행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조건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그렇지 않은데 상황이 나를 잘못을 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런 마음도 타인의 죄를 바라볼 때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간섭과 책망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에 속한 신자라면 자신이 자신을 책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책망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구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말합니다. 복음은 우리를 사정없이 책망함으로서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주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귀하게 여기는 신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형제에게 죄가 보일 때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살아가는 형제로서 그로 하여금 천국을 소망하는 자로 살아가도록 주님의 은혜만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도록 권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을 소망하기를 원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23절의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는 말씀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 있었던 금욕적인 율례와 연관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포도주를 마시지 않음으로 자신의 정결을 지키려고 하는 금욕적인 율례가 있었고, 디모데가 그러한 율례의 영향을 받아서 몸에 병이 있는데도 물만 마시고 포도주는 마시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비위나 자주 나는 병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디모데의 위장이 좋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연약함에서도 디모데는 자기 정결을 위해 자신의 병에 도움이 되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물만 마신 것입니다.



이러한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말하는 것은, 술을 마셔도 괜찮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디모데의 몸은 디모데의 것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도우이니 만큼 건강을 잃으면서까지 자기 정결을 지키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중요한 것은 자신의 정결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24-25절을 보면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었는가가 밝히 드러나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현대의 신자에게 있어서 힘든 것은 도대체 무엇이 진리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말하면 이것이 맞은 것 같고 저기서 저 말하면 저것이 맞은 것 같은 헷갈림 때문에 난감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선과 악이 밝히 드러날 때를 바라보면서 하늘에 속한 자로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흔들리지 말고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흔들리지 말고 세상에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이 세우진 복음의 증거물답게 복음에 모든 관심이 향하기를 소원하면서 복음을 증거하는 신자로만 살기를 소원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행은 결국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명하시는지 누가 나를 주관하시고 붙들고 계시는지 그리고 그 주관자께서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는지를 분명히 안다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지키는 것은 결국 복음에 마음을 두고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