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강) 디모데전서 6:1-2  종과 상전

 

<본문>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디모데전서 6:1-2)



<설교>

신자가 복음으로 산다면, 복음의 흔적은 자연히 그의 삶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1절에서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찌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본문은 종과 상전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무작정 종이 상전에게 취할 태도에 대한 규례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즉 ‘종은 상전을 공경하라는 것이 성경이다’라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상전에 대한 규례를 세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종이 상전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을 훼방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상전에 대한 공경을 말하는 것은, 단지 상전이 종으로부터 공경을 받아야 할 대상이라거나, 상전을 하여금 공경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종이 상전을 공경하고 안하는 것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이 훼방을 받는 문제로까지 언급을 하는 것일까요?



먼저 종이 상전이 공경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부터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종은 주인에게 종속된 노예의 입장에 있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하고, 아무리 일을 해도 자신의 소유로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일이년을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하고, 자신의 자손도 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비참한 인생이 종입니다.



이러한 종에게 과연 자신을 주관하고 부리는 상전을 공경할 마음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의 입장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라면 신세한탄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상전을 보면서 ‘하나님 왜 나는 종으로 태어나게 했습니까?’ ‘왜 나의 신세가 이럽니까?’라면서 자신의 인생 자체를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향한 불평과 불만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나요?’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창조 자체를 거부하게 되고 자신이 원하는 자신을 위한 창조를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세한탄이며 대개 이런 한탄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곧 복음의 정신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상전이 누리고 있는 것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면서 현재의 인생을 거부하는 마음에 상전 공경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불평과 한탄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겠다고 했느냐?’면서 하나님의 일 자체를 거부하고 싶어 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잘 먹고 잘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라는 것인데 복음의 정신 밖에서 인생을 바라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해야 할 일을 부여 받은 내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종으로 살아가는 처량한 자신의 신세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상전을 공경하라는 것은, 상전을 공경의 대상으로 여기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종이라는 신분으로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순종할 때 상전을 향한 공경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종이 종의 신분으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종이라는 처지가 자신을 은혜와 상관이 없는 자로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아는 신자라면 이러한 사람으로 고침받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종과 상전을 차별하여 대우하신다면 종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에 대해 불공평하다고 항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종과 상전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다만 똑같은 하나님의 도구로만 여길 뿐입니다. 마치 감독이 드라마를 촬영할 때 누구는 종으로, 누구는 상전으로 배역을 맡기는 것이 사람을 차별하기 때문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감독은 종의 역할에 맞는 사람을 골랐을 뿐이고, 상전의 역할에 맞는 사람을 고를 뿐입니다.



드라마에서 종이 영원한 종이 아니고 상전이 영원한 상전이 아닌 것처럼, 드라마가 끝나면 종이든 상전이든 똑같은 위치로 돌아가게 되는 것처럼, 세상의 삶이라는 것은 잠시 동안 이어지고 있는 드라마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기 배역을 맡아서 세상, 즉 무대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이라는 역할에 대해 무척이나 못마땅해 합니다. 이왕이면 편하고 쉬운 역할을 주지 않았다고 아우성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참으로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은 누구의 죄로 인함입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제자들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 차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잘 태어나고 못 태어난 것으로 사람을 구분한 것입니다. 두 눈이 멀쩡한 자신들에 비해서 사람이 날 때부터 소경이었다는 것은 뭔가 그 인생이 단단히 꼬였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제자들은 그것은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누구의 죄로 인한 것인가가 궁금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멀쩡한 눈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서 잘난 척할 것 없다는 것입니다. 멀쩡한 눈으로 태어난 것이 소경보다 잘났기 때문이 아니고, 소경보다 더 착하기 때문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멀쩡하든 소경이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하신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소경이다 아니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자로 살아가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세한탄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2절을 보면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고 말합니다.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라는 것은 상전이 같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고 해서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믿음의 형제라는 것을 자신의 유리함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형제이니까 다른 사람보다 자신은 특별히 잘 대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들이 상전을 공경하고 순종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경히 여기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믿는 상전을 만나게 하신 것은, 나에게 편함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는 형제의 관계에서도 상전을 공경함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나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믿는 상전에 대해서도 경히 여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하나님 왜 나는 이렇습니까?’라는 불평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자로 살기를 소원하고 힘쓰면 되는 것이지 타인을 바라보면서 타인처럼 되지 않는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한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연이란 우리의 눈과는 상관없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즉 내 눈에 예쁘고 예쁘지 않고 와 상관없이 자연 만물을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같으면 예쁘지 않은 것은 다 뽑아 버리고 예쁜 것만 남기고 싶어 하겠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예쁘지 않은 꽃도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피조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마음에 꼭 드는 정원을 갖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마음에 드는 정원으로 가꾸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생은 정원이 아니라 자연처럼 내 욕망과 상관없이 흘러갑니다.



종으로 나든 상전으로 나든 우리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상전이라고 해서 거들먹거릴 수 없고 종이라고 해서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에 의해서 났고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 받고 신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것으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