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강) 디모데전서 6:3-8  바른 말

 

<본문>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디모데전서 6:3-8)



<설교>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신에게 불리한 말이나 손해가 될 수 있는 말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항상 자신에게 유리한 말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도나 선지자들은 참으로 난처한 입장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전해 야 말들이 그들 개인을 유리하게 하거나 이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으로부터 반감을 일으키고 배척을 받을 수 있는 불리한 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선지자와 사도들은 그들이 전해야 했던 말씀으로 인해 원하지 않은 고초를 겪게 되었으며 심지어 목숨까지 잃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말씀을 바꿀 수 없는 것이 선지자와 사도의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3절의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라는 구절을 보면 다른 교훈, 바른 말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사도는 바른 말에 대해 설명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십자가에 대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십자가를 세상에 증거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경건에 관한 교훈 역시 십자가를 믿는 자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교훈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이 십자가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십자가만 전한다면 사람들의 인기를 얻지 못합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 거기에 부수적으로 사람들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들을 더하여 전해야만 소위 인기라는 것을 붙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십자가가 아닙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십자가가 아닌 다른 것을 바라보게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른 교훈입니다.



십자가는 신자로 하여금 자기 죽음의 자리로 내려가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사망에 처한 나를 구출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보게 합니다. 그리고 감사함이 있게 합니다. 때문에 신자가 예수님께 감사하는 것은 ‘나는 사망에 처한 자에 불과할 뿐입니다’는 고백이 있는 낮아짐의 자리까지 내려갔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있게 될 때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종이 상전을 공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종은 인간관계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천한 신분입니다. 하지만 육신은 종이라는 낮아진 신분에 있다고 해도 그 마음은 낮아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종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높은 자리에 있는 상전을 시기한다면 그것은 낮아진 마음이 아니라 높은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는 공경이 있을 수 없고, 종으로 살게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도 물론 있을 수 없습니다.



‘신분이 무엇인가?’에 상관없이 ‘주님 저는 사망에 처한 악한 자일뿐입니다. 이러한 저에게는 종의 신분도 과분할 뿐입니다’라는 마음이 낮아진 마음이고 이 마음에서 공경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조차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낮아지는 것을 거부하고 항상 마음을 높은데 두고 살아가는 악한 자일뿐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반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른 말이란 바로 이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파헤치며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꺾으며 낮아진 자리로 이끌어 가는 것이 바른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말에는 열심히 하고 잘하면 복 받는다는 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열심히 하고 잘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악한 자의 유희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바른 말에 착념하면 예수님 앞에서 낮아진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만약 바른 말에 착념하지 않으면 결국 교만한 마음에서 배출되는 죄의 흔적들만 보일 뿐입니다.



그 죄의 흔적들을 4,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1장에서 살펴본 대로 에베소 교회의 문제는 다른 교훈에 빠짐으로 인해서 신호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하고 변론만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다른 교훈에 빠짐으로써 그 마음이 교만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교만은 한마디로 말해서 사람이 자신의 악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악을 보지 않기에 지금도 예수님의 은혜가 자신을 살리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자신의 힘으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고, 자신이 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내세워 자기의 신자 됨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교만에서 변론과 언쟁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변론과 언쟁은 자신의 것을 주장함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고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의를 말하면서 그 의를 알고 있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기에 결국 자신의 옳음과 지식으로 변론하고 언쟁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와 변론을 하고 언쟁을 할 때, 그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과연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복음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받아들이기를 요구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한 것이라면 맺는 것은 감사일 것입니다. 이것이 서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누었고 사랑을 나누었고 성령으로 교제한 증거물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성경을 얘기했다고 해도 변론과 다툼과 언쟁이 남았다면 성경을 얘기했으되 그리스도로 교제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바른 말을 전한다면 그것은 함께 예수님이 못 박히신 낮아진 자리로 내려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주님이 계신 자리로 가지 않고 성경에 대한 지식만 머리에 쌓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의롭고, 주님을 잘 아는데 다른 사람은 모두 주님도 잘 모르는 악한 자로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바른 말은 이러한 모든 교만을 꺾어 버리고 우리의 심령을 붙들어 주님의 십자가 아래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지족하는 마음은 7,8절에서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언급한 것처럼, 인생이 세상에 오고 가는 것에 대한 이치를 깨닫는 것에 있습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 가지고 가지도 못한다는 것은, 지금 내 수중에 있는 모든 것은 내 소유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 마음대로 가지고 갈 수도 없는 것을 어떻게 내 소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고 잠시 내게 맡겨진 것일 뿐이라는 마음이라면 지금 주어진 것으로 얼마든지 지족할 수 있는 것이고, 이런 마음에서 변론과 다툼은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족하는 마음이 경건에 큰 이익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경건이 곧 십자가로 말미암아 자기 부족을 알고, 때문에 다만 그리스도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지 않을 때 인간의 마음은 높은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지금의 것에 지족하지 못하기에 지금보다 높은 것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높아지는 것이 은혜라는 말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높은 것을 추구하는 욕망이 지금의 자신에 대해 감사함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잘난 자가 보이고 나보다 많이 받은 자가 보이는데 어떻게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시기하게 되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십자가를 말하면서 ‘내가 죽어야 할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누가 못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 자신을 죽어야 할 자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높은 것을 추구하고 예수님이 계신 낮아진 자리로 가지 않으려고 하면서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말을 가볍게 하고 있는 자신의 악함과 위선에 대해 놀라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의 괴수였음을 마음 깊이 실감해야 합니다.



이러한 자리에서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예수님에 대해 고마움이 터져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계심으로 모든 것에 지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을 마음으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을 원하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타인과의 다툼이나 변론이나 시기는 사라지게 됩니다.



바른 말은 우리 모두를 십자가로 끌어갑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성경을 잘 안다고 해서 제외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른 말에 착념하며 살아갈 때 변론과 언쟁과 시기와 미움 대신에 사랑으로 교제하는 것과 감사함만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말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을 얼마나 알고 모르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성경을 어느 정도 알고 있든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감사함이 그 마음에 채워져 있고, 지족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그가 예수님을 아는 신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