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강) 디모데전서 6:7-10  일만 악의 뿌리

 

<본문>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디모데전서 6:7-10)



<설교>

교회가 하나님의 심판을 외면하고서는 교회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고는 십자가의 은혜 역시 마음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심판을 생각한다면 사람의 관심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달라지는 것에 두게 되는 것이 옳습니다. 세상 무엇도 자신을 심판에서 구출할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심판을 잊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달라지는 것이 관심이 아니라 세상이 원하고 세상이 부러워하는 인생을 사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생을 위해서 많은 재물이 손에 들어오기를 꿈꾸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을 꿈꾸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본문의 말씀은 찬 물을 끼얹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9절에서는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10절에서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말합니다.



부해지고 싶은 것이나 돈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들의 중단되지 않은 욕구입니다. 이러한 욕구가 영원한 생명을 가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는 멸망에 빠진다는 것은, 부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부자 되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를 멸망으로 끌어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부자 되고자 하는 마음은 곧 천국의 삶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삶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 역시 천국의 삶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의 생존을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땅에서의 생존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돈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게 하는 돈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는 사고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세상에 예수님의 피는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지며 외면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전혀 제공하지 않는 것이 예수님의 보혈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천국을 소망하는 신자에게는 예수님의 보혈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보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항상 소원해야 하는 것은, 땅에서의 생존을 목적으로 하는 삶이 아니라 천국에서의 삶을 소망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라면 부해지려고 하는 것보다, 내가 원하는 생존을 위해 돈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나를 영생에 있게 하신 예수님의 보혈로 감사하고 살아가기를 원할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세상에 십자가는 이미 인기 없는 말로 전락 된지 오래입니다. 천국을 가는 것은 좋아한다고 하지만, 교회에서 천국만 말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천국 외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는 이러한 인간의 욕망에 타협하여 십자가에 세상이 원하는 다른 것을 첨가하여 예수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이 생존이라면, 과연 하나님이 말씀하신 심판이 현실로 다가올까요? 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현실로 다가온다면 그에게 생존의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생존의 모든 문제도 결국 심판이라는 현실 속에 묻혀 버리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세상의 마지막을 뜻합니다. 세상이 위대하게 여기는 것도, 가치 있게 여기는 것도, 보물로 여기는 것도, 심판으로 인해서 모두 무너지고 사라질 뿐입니다. 때문에 심판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헛됨을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헛됨을 아는 자가 생존의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헛되지 않은 것, 심판에서 우리를 구출하는 보배를 필요로 하고 소망하게 될 뿐입니다. 이들이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좋다고 합니다. 돈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병이 들어도 돈이 있어야 병원을 갈 수 있고, 돈이 있어야 집도 살 수 있고, 하여튼 돈이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돈’ ‘돈’하면서 돈에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돈이 나를 살린다는 것인데, 이것이 곧 악입니다. 하나님이 살게 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이 살아야 할 근거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지금 살고 있으니 당연히 내일도 모레도 살아야 한다는 것만 생각할 뿐, ‘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목숨을 자신이 책임지고 있고 자신의 능력으로 목숨이 유지되는 것이라면 80이 아니라 800년을 산들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하지만 누구도 자신의 목숨을 책임지지를 못합니다.



자기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게 하신 분이 있기 때문에 ‘오늘 하루도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살 자격이 있어서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라는 것이지요.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니 단지 눈에 보이는 것만을 현실로 여기면서 생존을 위해서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사람의 본질을 잊으면 곤란합니다.  사람의 본질을 잊어버리게 되면 사는 것을 당연히 여기게 되는 것이고, 결국 더 나은 삶에 대한 욕구로 나아가게 됩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자격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사람의 본질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망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질 속에서, 인간이 과연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이 좋습니까? 솔직히 돈이 좋지 않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돈이 과연 좋기만 할까요? 돈은 우리를 웃게도 하지만, 울게도 하고, 분노하게도 하고, 염려하게도 하고, 친구를 원수로 만들기도 하고, 부모 형제도 버리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돈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지독한 자기 사랑 때문입니다.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은 악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자기 사랑이 악의 근원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돈을 사랑하는 이유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보면 돈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 사랑과 연결되는 것이고, 따라서 자기 사랑이 악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자기 사랑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닙니까? 의로운 자로 남고 싶어 하고, 가치 있는 인간되고 싶어 하는 자기 사랑의 인간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싫은 소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자기 사랑에 묻혀 사는 인간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니라 저주의 소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여서라도 그 소리를 듣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자기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돈일뿐입니다. 돈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뤄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을 것은 돈 밖에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눅 16:13-14절을 보면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라고 말씀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었겠습니까? 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로서 돈으로 사는 세상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십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에서 ‘사람이 돈 없이 어떻게 살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고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돈 없으면 안된다’는 것이야 말로 돈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기에 돈이 없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천국을 외면하게 합니다. 그래서 악의 근원입니다.



오늘날도 교회에서 복음이 비웃음을 받는 것이 현실입니다. 복음을 말하면, 눈앞의 현실을 외면한 비현실적인 말로 여길 뿐입니다. 복음만을 얘기하면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비난만 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 잘되는 것만이 아니라 육이 잘되는 것까지 책임지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세상에 주저앉을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향해서 하루하루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날마다 세상에서 떠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에서는 신자를 나그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땅에서 입고 먹고 마시고 다른 좋은 것을 누리며 사는 것이 목적이 되면 안됩니다. 그것이 돈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돈으로 사는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살아갑니다. 영원한 세상입니다. 반면에 이 땅은 썩어 가면서 점차 무너지고 있는 곳에 불과합니다. 마음을 천국에 두게 되면 자연히 사랑의 대상은 달라집니다. 돈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기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사람으로 달라진다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