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강) 디모데전서 6:11-12  선한 싸움

 

<본문>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디모데전서 6:11-12)



<설교>

신자는 하루하루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삽니다. 따라서 믿음이 없이 세상을 사는 사람과는 분명 그 삶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산 것과 믿음이 없이 산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과연 그 삶은 어떻게 다를까요?



이것을 이렇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신자가 하루아침에 믿음을 버려버린다면(물론 믿음은 버리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믿음으로 살던 사람이 믿음이 없이 산다면 분명 달라지는 것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천국을 소망하던 것이 사라지는 것일까요?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도 사후에 좋은 곳에 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교회를 다니지 않고, 성경을 보지 않고, 헌금을 하지 않는 것일까요? 물론 믿음을 버린다면 교회도, 성경도, 헌금도 멀리하게 되겠지만 믿음으로 사는 것이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보고 헌금을 하는 것으로 대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역시 맞는 생각은 아닙니다.



지금의 얘기는 믿는 자가 심사숙고해봐야 할 내용입니다.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믿음의 삶을 살게 합니다. 때문에 믿음을 버렸다는 것은 곧 믿음의 삶이 사라졌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을 살던 사람에게서 믿음의 삶이 사라졌다면 분명 있던 것이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과연 여러분이 오늘 믿음을 버렸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의 삶에 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되는 것을 제외하고 전혀 달라질 것이 없다면 그것은 그동안 교회를 다녔을 뿐 믿음의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얘기를 하는 것은, 여러분의 삶을 두고 책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삶에 대해 좀 더 긴장감을 가지고 깊은 생각을 해보자는 뜻에서입니다. 왜냐하면 오랜 세월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교회를 출입하는 것이 계속됨으로써 어쩌면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자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멀어진 채 교회를 찾는, 즉 습관과 형식에 빠져 있는 것이 지금 우리들의 현실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 말씀드린 것처럼 8절에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라는 말씀을 합니다. 즉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있는 형편에서 더 갖고자 하는 것은 욕망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9절에서는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진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말씀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먹을 것 입을 것이 있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지 못하고, 더욱 더 부해지고 싶은 욕망으로 돈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런 우리에게 사도는 본문에서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11,12절)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유리한 말, 내 마음에 드는 말은 받아들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무시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단지 세상을 사는데 필요한 좋은 말로 여기고 머리에 보관하는 것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가야할 길을 말씀하는 것이고, 신자는 그것을 외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11절에서 사도가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호칭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니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호칭은 세상의 사람을 둘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사단의 사람인 자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가는 길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단에게 속한 자들이 가는 길과 하나님께 속한 신자가 가는 길이 다르기에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피할 것은, 앞에서 언급한 부해지고자 하는 것이고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본래의 ‘우리의 마음은 어디를 향하는가?’입니다.



본래 우리 마음은 항상 부를 향해 좇아갑니다. 돈을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에게 사도는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고 말합니다. 좋아하는 것을 버리고 평소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좇으라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그것을 12절에서 ‘선한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이 취할 것은 돈이 아니라 영생이며, 이를 위해 부르심을 입은 것이 신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영생을 취하고자 할 때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갈등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을 취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 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가던 길과 다른 길을 가야하는 자로 부름을 입은 것이 신자이기에 다른 길을 가야 하는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속에서 발생하는 싸움이며, 이것을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귀를 만나 시험을 받으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귀를 만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복음을 전파하기 앞서 가장 먼저 마귀를 만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가시는 세상이 마귀와 전혀 다를 바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마귀의 생각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충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세상과의 화해가 아니라 충돌, 분쟁을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화평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검을 주시는 것입니다. 즉 전쟁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가장 먼저 제시한 것은,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마귀의 말과 예수님의 말 중에 어느 말이 더 마음에 와 닿습니까? 머리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는 의식이 만들어 내는 정답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본성이 제시하는 답은 사람은 돈으로 산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말씀이 밥 먹여 주느냐는 것입니다.



마귀의 두 번째, 세 번째 시험 모두가 동일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말씀에 기울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말에 더 끌리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영생을 취하라고 말씀하실 때, 그리고 그 말씀을 좇고자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은 옛사람과 말씀의 충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말씀한 것처럼 믿음으로 살던 신자가 믿음을 버렸을 때 달라지는 것은, 충돌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즉 선한 싸움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선한 싸움의 사라짐, 즉 있던 갈등이 사라지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그동안 충돌이 없는 삶을 살아왔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심사숙고 해봐야 할 내용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속에 아무런 충돌이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은, 마귀가 유혹하는 대로 내 육신의 이익을 따라 흘러온 삶이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신자가 부름을 입은 것은 세상의 썩어질 것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부름을 입었다는 것은 세상의 썩어질 것으로부터 빠져 나온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부름을 입은 자가 가야할 길은 영생을 취하는 길로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이 있는 신자에게 선한 싸움은 필연코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속에 하나님의 원수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자로 부름을 입었습니다. 때문에 신자는 부해지고 돈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아야 할 사람인 것입니다. 영생을 취하는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갈 5:16-18절을 보면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대적하는 것이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믿음의 선한 싸움은 있기 마련이고 그런 싸움이 없이 살았다면 그것은 성령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을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지 돈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돈으로 살고 하기 때문에, 부해지는 길을 가고자 하기 때문에 선한 싸움은 자연히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 항상 육신에 유리한 것을 선택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영생을 취하는 길로 끌어가시기 위해 하나님은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신자는 영생을 위해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으로 마지막 때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승리는 세상 속에서 영생을 추구하는 자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신자의 승리를 세상에 증거 하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