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강) 디모데전서 6:17-19  좋은 터

 

<본문>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디모데전서 6:17-19)



<설교>

본래 인간은 인생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인 것이 본래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사단으로 인해 인생의 방향을 자신에게 두게 된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나 방향이 자신의 높아짐으로 고정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인생의 목적도 방향도 오직 하나님께만 두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어떤 훼방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인생의 목적도 방향도 여전히 자기 자신을 향해 고정되어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높아짐을 위해 예수님을 부르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17절을 보면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라고 말합니다. 즉 부자들에게 말하라는 것인데, 여러분 중에 자신을 부자라고 여기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남들보다 돈이 좀 많다고 할 수 있는 분들도 ‘세상에 부자가 얼마나 많은데 나 같은 것을 부자라고 할 수 있느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부자들입니다. 8절을 보면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어도 족하다는 이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본다면 우리 모두는 부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도 여전히 여러분은 자신을 부자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이미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으로는 전혀 족함을 모르는 사람으로 마음이 높아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족한 줄 알고 살아가는 삶은 거절해 버릴 정도로 높은 마음들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높아져 있기 때문에 지금 주어진 것으로는 만족을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높아져 있기 때문에 타인에 비해 소유물이 적은 자신이 초라하게 보입니다. 많이 가진 자 앞에서 적게 가진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것이 높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결과들입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못하고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도 못하는 것이 인생임을 생각한다면, 지금 자신이 얼마나 부한 자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패한 마음입니다.



17절을 보면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라고 말합니다.



마음을 높이지 말라는 것은 마음을 낮추라는 뜻입니다. 마음을 낮춘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마음을 낮추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이 곧 낮은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소망을 둔다는 것은 세상에는 소망 둘 것이 없음을 깨달았음을 뜻합니다. 사망에 처한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아무리 땅의 것을 많이 소유했다고 해도 결국 사망으로 끝날 인생임을 알게 되고, 그러므로 세상 그 무엇도 사망에 처한 인간에게는 소망이 될 수 없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에 비로소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내어 놓으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이 소망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낮아진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는 마음인 것입니다.



결국 높아진 마음은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재물만 있으면 인생이 행복해질 것 같은 착각에 빠져서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 재물에 소망을 두는 것이야 말로 높은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에 먹을 것 입을 것으로 만족이 되겠습니까?



재물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사망에 처한 인간에게는 소망이 될 수 없음을 생각한다면 재물을 기준으로 해서 자신의 인생을 평가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사망에 처한 자를 생명으로 인도하신 그리스도만이 소망임을 안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인생이야 말로 그 어떤 부자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마음일 때 17절 끝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분’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분으로 말하고 있지만, 우리가 높은 마음에 있다면 그런 마음에 하나님은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분으로 여겨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높은 마음에서는 ‘나는 하나님께 후히 넘치게 받았다’는 고백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낮은 마음에서만 가능합니다.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아니하고 그리스도께만 소망을 둘 때, 그리스도를 나의 죄를 위해 대속 물로 주신 것만으로도 하나님께 후히 넘치게 대접받고 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낮은 마음에서는 먹을 것 입을 것만으로도 족한 줄로 알기 때문에 지금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높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채워 주시기를 원할 뿐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높아져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밑바닥에 구멍 난 항아리처럼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기만을 원하며 살아갑니다.



결국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아무리 후히 주신다고 해도 족함을 모르는 마음이고, 날마다 빈곤의 마음이 되어서 감사가 없고 기쁨이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불쌍한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인생은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 말씀을 기준하여 자신을 바라본다면 하나님은 지금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높은 마음으로 인해서 후히 주신 은혜를 누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정함이 없는 재물에만 소망을 둔 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낮아진 마음에서는 모든 것이 은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높아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지 않기 때문에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18,19절을 보면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선한 일, 선한 사업을 많이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낮아진 마음에서 선한 일에 나오게 되고 선한 사업에 부하게 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선한 일을 하고, 선한 사업을 하고, 나눠 주기를 부지런히 하라는 것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는가를 통하여 내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구제 했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선한 사업을 많이 했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낮아진 마음에서는 나눠 주기를 좋아하게 되고 구제도 즐거이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 제가 돈 많이 벌면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살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이 말에 나타난 잘못됨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금은 돕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남을 도울 형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마음이 이미 높아져 있는 것입니다. 후히 주신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에서는 죽을 때까지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것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는 것은,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은혜 안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얼마큼 많이 나눠주고 얼마나 많은 선한 일을 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후히 누리고 있는 자로 보면서, 후히 받은 것을 나누기를 기뻐하는 믿음에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19절에서 말하는 좋은 터란 참된 생명의 터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구제를 많이 하는 것이 참된 생명을 취하는 길이라는 것이 아니라 참된 생명의 터에 거하는 자로 살아가는 신자에게서 자연히 맺어지는 열매를 뜻하는 것입니다.



좋은 터에 거하는 마음은 그리스도께만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는 자신이 어떤 형편에 있든 모든 것이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오게 되며 감사하게 됩니다. 높아진 마음으로는 정함이 없는 재물에만 소망을 두게 되는 것이고, 이런 마음으로는 결코 족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좋은 터를 벗어난 마음이고, 이런 마음으로는 나눠 주기를 즐거워 할 수도 없고 선한 사업에 부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것을 챙기기에 바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것보다 더 후히 주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높아져 있어서,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보지 못합니다. 재물로 내 마음을 채우려고 하기 때문에 나눠 주기를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신자는 소망을 예수님께 두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좋은 터를 쌓는 것입니다. 인간이 왜 예수님에게만 소망을 두어야 하는지 다시금 깊이 생각할 수 있기 바랍니다. 왜 재물이 정함이 없는 것이고 소망이 될 수 없는지를 인간의 본질에서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