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강) 디모데전서 6:20-21  좇지 말아야 할 것

 

<본문>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디모데전서 6:20-21)



<설교>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20절)는 마지막 당부를 합니다. 과연 사도가 디모데에게 피하라고 당부하고 있는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은 무엇일까요?



디모데는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이점을 생각해 본다면 사도가 당부하고 있는 피하라는 것은, 복음을 훼방하는 말이라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가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둔 것은 1:3,4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당시 에베소 교회에 다른 교훈을 가르치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케 하는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런 무리로부터 에베소 교회의 신자를 지키기 위해 디모데를 남겨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훈은 하나님의 일만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인간들에게 어떻게 개입하였으며 하나님의 일로 인해서 인간이 어떤 은혜를 입었는가를 증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교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훈이 목적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믿고 의지하는 자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설사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 할지라도 의심이 없고 두려움이 없이, 멸망의 자식에 지나지 않는 자신을 인도하여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신 그 사랑과 자비하심을 신뢰함으로 순종케 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의 일에 관심을 두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교훈이 목적하는 길에서 벗어난 채 인간의 일을 이루기 위한 교훈으로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일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피 흘리신 공로로 사망에 처한 죄인을 구속하신 구속사역만 증거하는 것이 복음인데, 다른 교훈은 사람을 일을 위하고 돕기 위한 복음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피하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복음이 교훈하는 것만 증거 하는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은 무작정 좋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나를 천국가게 하기 위한 것이 복음이기에 복음을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복음이 담고 있는 교훈, 즉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좋은 것이라는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면 모두가 복음인 것으로 착각해 버립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복음을 좋아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인간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력도 열심도 그리스도의 공로 앞에서는 헛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다른 교훈은 인간의 노력과 열심을 옹호합니다. 오히려 열심히 노력하여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것이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인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나온 말이기에 거짓된 것이고 망령된 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바라보게 하는 말이 아니기에 허한 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서로 자기의 일을 내어 놓으면 결국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 자기의 일을 내세워 경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21절에서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찌어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일을 내어 놓는 것은 믿음에서 벗어난 것이기에 좇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내어 놓을 것은 그리스도부터 받은 은총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그리스도의 피를 내어 놓고 그리스도의 공로로 사망에서 건짐 받게 된 것을 자랑하는 것이 곧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선 신자에게서는 자신의 것이 나올 수가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공로 앞에 자신의 것은 어떠한 것이라 해도 무가치한 것이고 허접한 것임을 스스로 깊이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계에서는 변론 역시 나타날 수 없게 됩니다.



변론은 인간의 충돌의 결과입니다. 서로 자신의 것을 주장함으로써 결국 변론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자신의 말, 자기 지식의 옳음을 증거하기 때문에 변론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을 증거하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 자식의 지식을 내어 놓기 때문에 변론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경륜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증거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즉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내 죄로 인해 세상에 오시고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공로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인간의 공로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변론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변론은 인간의 공로의 충돌이기에, 예수님의 공로만 자랑하는 관계에서는 충돌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얘기할 때도 자신의 지식을 내어 놓는 것이 되면 결국 변론이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말이 맞음을 주장하는 방향으로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함께 앉아 성경을 얘기하는 본질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신자가 함께 성경을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서로 나누면서 주님의 은혜에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본질에서 벗어나게 되면 결국 자신의 말이 맞다는 것을 주장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믿음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내가 말하는 것이 아무리 진리라고 해도 내 말을 받지 않으니까 그는 신자가 아니라는 판단을 하여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내 말이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고, 자연히 맞는 말을 하고 있는 자신은 믿음에 있는 자라는 결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인가 신자가 아닌가라는 것은, 그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인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그리스도만이 아실뿐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설사 자기에 대해서도 자신이 복음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다고 해서 ‘나는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에 있다’는 말을 섣불리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와의 바른 관계의 증거가 아니라 날마다 자신의 무너짐에서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맛보며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에 있음으로 나타나는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다른 말을 한다고 해서 그를 신앙이 없다고 규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벗어난 말을 한다면 무엇이 복음인가를 증거함으로써 더 깊은 신앙의 기쁨이 있는 자리로 인도하고자 하는 것이 여러분의 할 일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신자는 지식을 전달하고 나와 같은 지식을 갖게 하는 것이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의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기쁨을 맛보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 감사와 기쁨으로 인도하는 것이 말씀이기 때문에 신자가 진심으로 말씀 안에서 만난다면 헛된 말도, 변론도 있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목사인 제 자신도 항상 이것을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목사는 설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설교를 위해 설교를 하게 되면 자칫 목사 자신부터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기쁨에서 멀어진 상태에서 성경을 얘기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 스스로도 이것을 경계해야 하고 여러분도 이것을 경계하면서 언제나 그리스도로부터 받아 누리고 있는 것을 내어 놓고 증거하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는 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좇는 것은 믿음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믿음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기독교를 버리고 다른 종교를 선택했다는 뜻이 아니라 믿음이 목표하는 것에서 벗어난 것을 뜻합니다.



믿음이 목표하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악함을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기쁨으로 살게 하는 것이 믿음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이 목표에서 벗어남으로 결국 자신의 말과 자신의 지식을 내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신자가 좇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신자의 관심은 한순간도 주님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것에서 벗어나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자신을 어느 정도로 경계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날마다 자신을 살피며, 주님의 길에 서 있는지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인지를 살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해야 신앙이 있는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 속이 그리스도를 향한 감사로 채워져 있다면 믿음이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가장 크신 분으로 내 속에 자리하기 때문에, 자연히 크신 분을 자랑하게 되는 것이고 크신 주님 앞에서 자신의 초라함과 못남을 여실히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의 것은 그 어떤 것도 내어 놓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신자가 이렇게 사는 것 또한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 삶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것, 인간의 것을 내어 놓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는 말로 서신을 마치고 있습니다. 주의 은혜가 그들을 믿음의 길로 이끌어 갈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