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의 환란 (고후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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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란 자기의 희생으로 남을 살리는 자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는 사람입니다. 신자가 살아 있는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살아날 누군가를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살려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고 영원한 죽음에 처해야 할 우리들이 지금도 숨쉬고 있고 또 그리스도를 부를 수 있는 신자 된 무한한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이미 대제사장 되시는 주님이 보여주신 생애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아주 어렵게 하고 난감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매를 맞고 고난을 당해도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감수하고 견딜 수 있지만 자기에게는 전혀 이익이 되지 못하고 전적으로 타인을 위해서 받는 고난에 동참하라고 요구하셨을 때 우리는 그 요구에 머뭇거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 여러분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으로 기대하면 안됩니다. 물론 마지막에 신앙은 여러분을 고통이 없고 눈물이 없는 천국으로 인도해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천국에 도착하기 전에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정체를 드러내는 일에 쓰여질 뿐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인생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행복해지고 편안해지는 길을 찾아서 헤매고 심지어 교회에서도 신자들에게 행복해질 수 있는 비결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실정이지만 우리는 세상의 짐을 벗고 행복을 찾기 위해서 주님께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하는 상담이라는 것도 그 목적이 행복 찾아주기에 있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불행의 요소를 찾아내서 그것을 제거함으로서 행복을 누리게 해주는 마법사의 역할을 하는 것이 소위 목회 상담이라는 것입니다. 남의 짐을 벗겨 주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을 때 무거운 짐을 벗겨 주기 위해서 오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을 해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내 짐을 좀 벗겨 주십시오'라고 외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짐을 벗겨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내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짐으로 여기시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짐이라는 것은 인생을 자신을 위해서 살고자 하고 자신의 기쁨을 채우기 위해서 일하고자 할 때 지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앞세울 때 짐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 쉽고 가벼운 것이 됩니다. 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짐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여러분의 이웃 덕분에 유지되고 있음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누군가가 여러분 주위에 있기 때문에 그 일을 여러분이 감당하라고 생명을 유지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서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롬 9:1-3절에 보면 이러한 사도 바울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것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일이라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의 마음이었고, 오늘 본문에서도 이러한 마음으로 형제를 대하는 바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의 환난이 나옵니다. 우리는 사도나 선지자들의 순교나 환난에 대해서 들으면 하나님의 사도이고 선지자니까 그런 일을 겪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을 증거하고 주님을 섬겼던 사도들, 선지자들의 인생이 그러했다면 오늘날 주님의 증인으로서 사도와 선지자의 역할을 하며 살아가는 신자 역시 그들과 같은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6절에 보면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 하여 우리가 받는 것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환난을 받았던 것은 누구를 위함이라고 합니까? 고린도 교인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해서 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바울 자신이 환난 속에서 능히 그리스도로 기뻐하고 위로 받는 모습을 통해서 환난가운데 있는 신자들에게 위로가 되고 구원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환난을 억울해하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열심히 주님의 복음을 전했는데 왜 이런 환난을 겪게 하는 것인가라는 불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그 일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안배하신 하나님의 계획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1:20,21을 보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몸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만을 위해서 힘썼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위해서는 죽는 것이 유익하지만 너희를 위해서 살아있는 것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누구를 위해서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이 살아있다는 것이 여러분의 이웃에게 유익이 되고 있습니까?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린 내가 이웃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기는커녕 나를 위해서 이웃이 사라져 주기를 원하는 마음으로만 살았던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시선은 나에게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향해있음을 생각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시선을 두시는 곳에 우리의 시선을 두도록 합시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의 하나하나는 주님을 위한 것이 될 것이고 나를 보기보다는 이웃을 보며 살아가는 삶으로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뭔가 어려움을 당한다면 그 어려움을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이웃에게 증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기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됩니다. 5절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고난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같은 고난이라는 의미로 봐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과 똑같이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고난의 결과가 다른 사람에게 구원이 되었던 것 같이 내가 받는 고난의 결과가 다른 사람의 위로와 구원을 위한 것이 되었을 때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결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애매하게 고통과 어려움을 주시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위로와 구원을 위해서 여러분에게 고통과 어려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환난가운데 있을 때 자신의 괴로움을 생각한다면 불평과 원망이 나오겠지만 이웃의 유익을 생각한다면 환난 속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나타내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께도 그것을 묻게 될 것입니다.

신자가 환난 속에서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천국을 사모하는 모습을 보일 때 같이 환난에 처해 있는 이웃이 있다면 그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당한 환난이 어느 정도 였는가를 잊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기까지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기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결국 바울은 성도들에게 환난은 하나님을 의뢰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임을 환난에 던짐 받은 자신을 통해서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이웃이 여러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형제된 우리가 서로서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형제의 위로와 구원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로 인해서 위로 받는 삶을 나타냈다면 그 위로가 형제로 하여금 고난을 견디게 할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신자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