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의 소원 (고후 5:1-10)

9802080611

지난 시간에는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는 사도 바울의 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보이는 것에 연연하지를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영원한 세계가 그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세계보다 더 찬란하고 영광되고 귀한 세계가 사도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보이는 세계에 유혹되지 않고 오직 주님을 위해서 살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매를 맞고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때가 있음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의 믿음의 대상은 모두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조차도 하늘로 가셔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주의 음성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음성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하지 아니하고 비록 주님은 보이지 않지만 자신과 함께 하고 계심을 믿으면서 고난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육신적으로 실패하고 망한다는 것이 바울의 마음을 흔들지 못했습니다. 다 잠깐 있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바울의 삶을 우리와 비교할 때 우리는 너무나 보이는 것에 연연하고 매여 산다는 한탄이 나오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보이는 것이 삶의 목표이고 전부이지만 신자에게 있어서 보이는 것들은 무엇이라 할지라도 믿음을 방해하는 장애물이고 걸림돌입니다. 믿음 역시 보이는 것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활용해 버립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죽음 이후의 문제로만 여겨버리고 육신으로 살아가는 동안은 보이는 것을 마음껏 누리고 소유하는 것을 축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7절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 말합니다. 보는 것의 반대로 믿음을 말합니다. 결국 여기서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으로 행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이 비록 교회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믿음과 연결 지어 말하지만 보이는 교회 역시 영원하지 못하고 잠깐 동안 눈에 보일 뿐입니다. 영원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보이지 않는 교회입니다. 보이는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헌금하는 것들을 주님께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보이는 교회에 하는 것은 단지 인간의 종교 조직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이는 교회에 한 것 때문에 세상에서 축복이 주어질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단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제공할 뿐입니다. 상도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주어지는 상이지 보이는 세계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생각과 원수된 것은 육신의 생각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말했습니다(롬 8:6,7). 육신의 생각은 보이는 것을 좇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 생각이 바로 사단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게 하지만 사단은 보이는 것을 바라보게 하고 보이는 것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신비스런 현상이나 종교적인 모습들에게 마음두는 것 역시 사단의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아주 부담되는 일입니다. 부담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천국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을 쉽사리 놓지 못하는 이유도 역시 천국은 보이지 않지만 세상은 확실히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대한 보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상에 대한 보장은 눈에 확실히 보여집니다. 돈이 있으면 떵떵거리고 살 수 있고 갖고 싶은 것을 마음껏 가지며 살 수 있다는 보장이 분명히 있습니다. 때문에 보이지도 않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천국 때문에 눈에 보인 세상을 포기할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있다면 그 사람은 인간 본성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뭔가 다른 본성이 그 사람을 지배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오늘날 신자들의 차이점을 말한다면 보이지 않는 것을 의지하는 것과 보이는 것을 의지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한쪽은 믿음이고 한쪽은 믿음이 아닙니다. 한쪽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고 한쪽은 하나님과 원수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이면서 믿음이 좋은 척 행세하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눈에 보이는 교회에 봉사하고 충성하지 주님께 봉사하고 주님께 충성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바라보고 교회가 잘되는 것을 흐뭇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사람이 되고 목사의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을 의지해야 하는 불안감을 보이는 목사를 의지함으로 해소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신자들에게는 자기 교회가 있고, 내 교회 목사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교회에 자기 노력과 시간과 돈을 투자하면서 자기의 것만 가치 있게 여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것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1절에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집에 무너져야 비로소 하늘의 영원한 집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천국을 말하면서 그 마음에 천국을 두고 살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마음속에 보이는 집이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이 무너져야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세상 것이 무너지지 않았고 세상 것으로 가득 입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사모하겠습니까? 세상 것으로 만족을 누리고 있는데 뭐가 아쉬워서 보이지는 않는 것에 소망을 두겠습니까?

우린 성경을 통해서 사도 바울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과 선지자들까지도 바울의 삶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분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 것 때문에 기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자기의 육신의 생명까지도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서 포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사도들과는 달리 보이는 것을 위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포기하는 삶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니까 그렇게 살아야 하고 사도니까 그렇게 살아야 하고 선지자니까 그렇게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나는 사도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고 예수도 아니니까 그분들의 삶과 나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앞서서 신앙의 삶을 살았고 천국을 가신 그분들은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대표로 가고 우리에게는 다른 길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은 오직 이 한길밖에 없으며 이 길이 어떤 길인가를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선지자, 사도, 예수님이 가신 길로 가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목사 되라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의 마음자세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보이는 것을 벗어버리는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마세요'라는 말 한마디에 그말대로 하는 인간이 아닙니다. 하지 말란다고 해서 하지 않을 인간이라면 애당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문제에 괜히 예수님이 끼어 들어서 잘난 척 한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인간은 안된다는 선언입니다. 즉 인간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순간순간 세상으로 돌아가는 자신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나오는 것은 탄식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며 살았던 것은 바울의 믿음이 좋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4절을 보면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장막 집을 벗어버릴 때 가능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장막 집을 스스로 벗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처소를 덧입음으로 장막 집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입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즉 생명을 입을 때 죽을 것, 즉 장막 집, 눈에 보이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늘의 처소로 덧입기를 사모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합니다(5절). 즉 바울은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을 입음으로 인해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바라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도 간절히 사모해야 할 것은 스스로 장막 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입음으로 우리에게 있는 죽을 것이 모두 성령에게 삼킨바 되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빨리 세상을 떠나서 주와 함께 영원히 거하고 싶다고 합니다(8절). 그러기 때문에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소망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사도가 간 길이고 예수님이 가신 길입니다. 그 길은 내가 가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가게 하실 것입니다. 문제는 과연 우리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고 영원한 것을 사모하는 신자로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