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소망 (고후 5: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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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일의 결과가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을 때 힘을 내어서 일을 할 수 있고 일의 보람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일이 돈을 버는 일이든 아니면 자원 봉사를 해서 사람들의 칭찬을 듣든 모든 결과를 자기에게 집중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어떤 인간도 결과를 기대하지 않고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 결과가 없는 일이란 헛된 일로 생각해 버립니다. 일을 하면서 자신에게 돌아올 어떤 결과를 상상할 때 휘파람이 나오고 노래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에게 일을 요구하면서 그 결과를 자기에게로 돌리지 말라고 할 때 그 요구에 순순히 순종을 하겠습니까? 비록 어떤 힘에 눌려서 그 요구에 순종한다고 했을 때 그 일은 자신에게 피곤으로 돌아오고 짜증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일을 하면서도 온갖 불평을 다 내뱉고 할 수 없이 죽지 못해서 하는 일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에 바로 이러한 요구가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하고서도 결코 그 결과를 자기에게로 돌리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잘한 일이 있어도 그 칭찬을 자기 것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 믿음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점이 신자를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일하고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자기를 위해서 일하지 말고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보통 무리가 아닌 것입니다. 내가 아닌 다른 대상을 사랑해야 하고 섬겨야 하고 그분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보통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 신자가 나 아닌 다른 분을 위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그분과 나와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할 때 가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누군가에게 '너 저 사람을 위해서 살아라'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이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고 자기를 위해서 해준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일 때는 그 말을 정신나간 소리로 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자신을 대신해서 자기 몸 전체를 죽음으로 내 던진 분이라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나를 대신해서 죽은 분이라면, 내 생명은 이미 그분 때문에 다시 살아난 것이기 때문에 그분을 위해서 살아라는 말에 반발할 수 없을 것이고, 또 은혜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할 것입니다.

제가 지금 누구의 이야기를 하는지 다 아실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부족한 것은 예수님과 신자의 관계입니다. 주님께서 나 대신 죽으셨다는 그 관계에 깊이 빠져들어 가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죽어야 할 자임을 깊이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어야 할 자였다는 것을 모르는데 나 대신 죽었다는 것이 실감이 나겠습니까? '뭐하러 나 때문에 죽었는데'라고 하면서 멀뚱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 죽음을 모르는 자 주님의 은혜를 모를 수밖에 없고 주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 주님을 위해서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믿어주는 차원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에서 믿어주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주님과 상관없이 교회에 나오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그런 신앙은 생명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오래 믿어온 기독교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는 죽음과 생명이라는 문제가 놓여져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믿으라고 해서 믿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지 않고서는 그 어떤 희망도 때문에 내 몸 전체를 다 드리고서라도 주님을 믿어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신자들에게는 그런 절박감이 없습니다. 경제가 불황이라고 해서 돈에 대한 절박감은 있고 직장에 대한 절박감만이 마음을 차지하고 있고 도무지 주님에 대한 절박감이 없습니다. 죽음과 생명의 차원에서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0절에 보면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합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그리스도의 심판대로 이어집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우리를 기다립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습니다. 선악간에 행한 대로 심판대 앞에 선다고 합니다. 때문에 신자는 심판대를 생각하며 자신의 행동을 점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지난 금요일에 저는 모 목사님의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에 모 교회 장로님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58세이고, 장로님은 80세가 다 되었거나 넘은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목사님의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죽음은 오는 순서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내일 내가 저 관속에 들어 있을 수 있음을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죽음은 세상에 온 순서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만납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의 심판대입니까?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인간다운 인간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깨끗한 마음을 따르는 사람들만 새하늘과 새땅에서 살게 하시겠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심판대입니다. 심판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없애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심판대의 기준은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 기준을 미리 보고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선이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지 않는 것이 악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항상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자 힘썼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무리가 되는 것인가를 잘 압니다. 이것은 그렇게 하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되어지도록 할뿐입니다.

14절 15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 즉 예수님의 죽음을 모든 사람, 즉 세상의 모든 인간의 죽음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죽었으니까 이제 우리는 죽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세상의 모든 사람 앞에서 '너희가 죽어야 할 악한 인간들이다'는 것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품에만 품고 있으면 복을 주고 나를 구원시켜주는 마술 지팡이가 아니라 나를 죽이는 십자가입니다. 나를 찌르고 고발하고 무너뜨리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집안 벽에 붙여 놓고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표내는 도구가 아닙니다. 나의 죽음을 확실하게 해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신 말은 우리의 외침이 되어야 했습니다. 다만 그 외침을 예수님께서 대신 하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자로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 쉽게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은혜를 말합니다. 바리새인같이 '나는 십일조 잘하고 구제 많이 하고 기도 많이 했으니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실꺼야'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길은 주님이 가신 버림받음의 길이지 결코 그럴듯한 종교행위의 길이 아닙니다. 만약 종교 행위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순서를 정한다면 지금 교인들이 생각하는 대로 목사, 장로, 권사, 집사, 평신도 순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나를 마땅히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아야 할 사람으로 인정하는 그 길에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야 할 존재이지 결코 사랑 받을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장 인간다운 인간만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나를 사랑해 주세요'라는 외침이 나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향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만 하나님의 사랑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원하신다면 자기를 버리는 길에 들어서십시오. 그 길이 주님이 가신 길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그리스도안에서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자만이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의 소망은 주님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자기 뜻을 위해서 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주님의 피가 죽은 우리를 산자로 바꾸었음을 잊지 마시고 이제부터 여러분의 인생의 소망을 주님께만 두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