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혜 (고후 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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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사랑과 현실은 다르다는 말을 합니다. 즉 사랑하는 것만으로 현실을 살아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현실을 사는데 있어서는 사랑 외에도 필요한 조건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생각에 의해서 요즘 청년들 가운데는 사랑은 사랑이고 결혼은 결혼이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늘어가는 것 같습니다. 사랑이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이란 현실을 극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단지 좋아한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나를 포기하고 상대방을 선택한 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만 있으면 나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만이 현실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이 인간에게 가능합니까? 과연 자기를 버린 사랑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습니까? 그 사랑은 주님 말고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랑이야기를 했지만 은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는 현실을 극복하게 합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은혜와 현실을 따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은혜만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것은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 받은 자답게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은혜 받았다는 말을 많이 하면서 신앙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설교를 듣고 나서 은혜 받았다고 하고, 찬송을 부르고 나서 은혜 받았다고 하고, 간증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은혜 받는다는 것을 마음에 감동이 오고 기분적으로 나아지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사람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음에 그 느낌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가 아닙니다. 분위기에 도취되는 것을 은혜라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기를 발견한데서 출발합니다. 자기의 본질을 발견하지 못하고서는 은혜를 언급할 수 없습니다. 은혜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영원한 생명입니다. 1:10절에 보면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 말합니다. 은혜는 사망 속에서 우리를 건지신 것입니다. 죽어야 할 자가 살아난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란 구원의 근거를 구원되는 인간에게서 찾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의 근거를 인간에게서 찾는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보상입니다. 은혜는 인간의 행함을 보지 않고 단지 그 사람을 누가 살려주느냐만 볼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은혜가 아니고서는 결코 남은자 속에 포함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은혜에 대해서 가장 어리석은 인간의 생각은 받은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계속해서 은혜를 유지할 만한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었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참여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는 개인의 결단과 선택 그리고 끝까지 자기를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은혜를 알지 못한 자가 은혜를 남발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위의 말대로라면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은혜를 주셨으니까 그 은혜를 지키고 못지키고는 인간의 손에 달렸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죽으신 후에 인간은 은혜로 사는 것입니까, 아니면 자기 힘으로 사는 것입니까? 은혜를 지키고 유지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등장하는 것이 인간의 열심인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지만 그 은혜는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고 남은 것은 은혜를 유지하고 보전하기 위한 인간의 열심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음의 소치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이 은혜를 전혀 모르고 있는 사고 방식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은혜라는 것은 처음 한번 주어진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 사람을 점령하고 다스리는 권세이고 힘이기 때문입니다.

롬 11:6절에도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고 합니다. 행위로 말미암은 것은 은혜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은혜 되는 것은 은혜에 의해서 인간이 다스림을 받아 살아갈 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라면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을 포함한 채 인간을 정복해 들어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은혜를 받은 자라면 필히 은혜를 주신 분의 주관 아래서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독자적인 삶의 영역을 정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가 은혜 된다거나 은혜가 왕노릇한다는 것은 은혜의 다스림을 받아 살아가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받은 자는 은혜의 출처가 자신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이고 사랑이심을 알기 때문에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증거 하게 됩니다. 세상에 고개 숙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세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선포하게 됩니다.

교회가 은혜는 쉽게 말하지만 은혜를 행함이 아니다는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은 드물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은혜란 내가 은혜받을만 해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선택하셔서 주시는 것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따라서 은혜 받기 위해서 뭘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엉터리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심으로 은혜 받은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 말하게 됩니다. 자기 행함을 버리고 하나님께 나오게 됩니다. 사망에서 건짐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할 뿐입니다. 은혜에 사로 잡혀 살기 때문에 세상 것이 있고 없고에 대해서 마음 뺏기지 않고 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것은, 지금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서 벗어나서 본래의 인간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한 책망이고 권면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다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분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그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에 간직되어 있습니까? 은혜에 붙들린 채 세상을 살아가십니까? 은혜에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필히 그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4-1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은혜를 간직한 채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은 세상이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무명한 것 같고, 징계를 받는 것 같고, 죽는 자 같고, 가난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명하고 죽임을 당하지 않고 기뻐하고 부요하고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 살아갑니다. 여러분에게 과연 이러한 은혜의 표시가 있습니까? 가난하지만 부요함으로 살아가십니까? 근심하는 자 같지만 항상 기뻐하며 사십니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모든 것을 가진자 처럼 살아가고 있습니까? 은혜가 있는 신자는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삽니다. 그것이 '은혜 있음'의 표시입니다.

'믿는다' '은혜 받았다'라고 하면서 날마다 근심하고 염려에 빠져 살고 남들보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서 불평하고 원망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과연 은혜 받은 자의 삶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은혜를 간직한 채 세상을 사신다면 분명히 그 은혜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에 의해서 움직이고 은혜에 의해서 달라진 흔적이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말하면서도 그 흔적을 보이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은혜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란 앞서 말한 대로 죽을 자가 살아난 것입니다. 사망에서 건짐 받은 것이고 망해야 할 자가 망하지 않고 영생으로 인도함 받은 것입니다. 망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거부하고 반박해 버리는데, 우리에게는 은혜를 주셔서 믿게 하시고 감사하게 하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천국을 가장 귀한 것으로 알고 천국을 바라보고 소망하는 사람 되게 하신 것이 은혜이고, 그 나라에 대한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가 주어지고 은혜로 살기 때문에 그 사람은 세상 것이 없다고 해도 슬퍼하지 않고 항상 여유있고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2절에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라고 하는 것은 은혜 받기에 좋은 조건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긴박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세대는 세상 것이 필요한 때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세상과 상관이 없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버릴 것은 버리게 하고 소망할 것을 소망하게 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일군은 바로 이 은혜를 간직한 채 살아가는 자입니다. 세상 것이 있고 없고에 상관없이 그리스도로 기뻐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은혜가 그 사람을 붙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도 은혜가 주어진 신자입니다. 문제는 은혜에 붙들려 사느냐는 것입니다. 혹 은혜를 헛되이 하지는 않습니까? 사망 속에서 살아난 자임에도 불구하고 썩어질 세상 것 때문에 조바심을 가지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은혜에 붙들려서 은혜의 흔적을 나타내며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