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자녀 (고후 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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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마지막을 알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마지막을 아는 지혜가 현재의 삶의 방향을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같이 마지막을 보지 않고 삽니다. 이것이 사단의 유혹에 빠져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사단은 인간으로 하여금 현재를 바라보게 함으로서 마지막을 잊고 살게 합니다. 창 2:17절에 보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먹었을 때의 마지막을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사단의 유혹에 빠졌을 때 단지 선악과가 가져올 혜택에만 정신이 팔려 있을 뿐이지 하나님이 말씀하신 마지막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도 처음의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마지막에 서서 현재를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마지막의 자리에 서 있을 때 현재가 바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전도서 7:2절에도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고 합니다. 잔칫집에는 마지막이 없습니다. 오직 새로운 출발에 대한 꿈에 부푼 인간의 욕망만 가득할 뿐입니다. 그러나 초상집에는 시작이 없고 마지막이 보일 뿐입니다. 마지막에 대한 울음과 통곡만이 자리합니다. 초상집에서 인간의 마지막을 바라보면서 살아있는 자신의 현재를 해석하는 것이 참다운 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습성은 마지막을 무시하고 현재에 집착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저에게도 여러분에게도 이 습성은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습성에 빠져 살아갈 때 인간에게서는 현재를 위해서 온갖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거기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모습만 보여질 뿐입니다. 심지어 교회도 심판을 말하고 재림을 말하면서도 현재를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재림이나 심판이라는 것은 지금의 현재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말입니다. 지금 재림을 여러분 앞으로 앞당겨 버리면 그 앞에서 남아 있을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재림을 말하면서도 진심으로 재림을 맞이하는 순간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까마득히 멀리 있는 것을 바라보는 여유 있는 마음으로 재림을 말하고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재림과 심판을 말하는 교회가 눈에 보이는 현재의 것에 마음 뺏겨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서의 성공과 발전을 꿈꾸며 사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하고 약속하신 마지막의 심판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는 악의 모습입니다. 악의 지배를 받고 있는 세상은 인간으로 하여금 마지막에 눈을 돌리지 않게 합니다. 항상 현재에 소망을 두고 희망에 부풀어 살도록 합니다. 마지막에 매어 사는 것은 꿈과 희망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삶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은 마지막이고 살아있는 동안 현재를 즐기고 보람있게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 세상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의 가르침입니다.

인간을 죄인이라고 너무 몰아세우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고 의인된 인간을 너무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는 말을 교회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사단의 소리입니다.

여러분, 죽음과 세상을 대입해 보십시오. 죽음은 세상의 모든 것을 삼켜 버립니다. 여러분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도 죽음 앞에서는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 세상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현실에 대한 욕망에 집착해서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이 결국 비현실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극히 현실적인 삶이라고 하겠지만 마지막을 두고 생각하면 비현실적인 삶입니다.

신자와 신자가 아닌 자의 삶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출발부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마지막을 시작으로 해서 현재로 오지만, 비신자는 현재를 출발해서 현재에 머무르고 맙니다. 때문에 현재의 비현실성을 깨뜨려 줄만한 기준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자기 욕망에 도취되어서 자기를 위한 멸망의 삶으로 달려갈 뿐입니다. 따라서 신자와 비신자의 삶은 전혀 일치성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신자와 비신자의 전혀 일치할 수 없는 삶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14절부터 보면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라고 말합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것은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고 사업을 같이 하지 말라는 의미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농사를 지을 때 땅이 척박해서 두 마리의 소를 이용합니다. 그럴 때 만약 두 마리의 소가 서로 마음이 맞지 않는다면 농사를 지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멍에를 같이 한다는 것은 서로 마음이 맞는다는 뜻이 됩니다. 즉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는 것은 믿지 않는 자와 마음이 맞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지 않는 자의 사고방식과 같은 마음으로 사는 것이 멍에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말씀의 뜻은 분명해 집니다. 비신자가 현재를 바라보고 현재를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와 불법이 함께 하는 것이고, 빛과 어두움이 사귀는 것이고, 그리스도와 벨리알(사단)이 조화하는 것이고,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상관하는 것이고, 성전과 우상이 일치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의와 불법은 함께 되지 않는 것이고, 빛과 어두움이 함께 섞여질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의와 불법이 함께 한다면 의가 의의 모습을 버렸기 때문이고, 빛과 어둠이 사귄다면 그것 역시 빛이 빛의 모습을 포기했기 때문이 됩니다.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18절에 보면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한대로 신자와 하나님의 관계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흔히 신자들은 하나님을 아버지, 신자를 자식이라고 할 때 자식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러나 자식은 아버지의 것을 누리는 의무가 아니라 아버지를 섬겨야 할 의무가 있는 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말입니다.

따라서 신자를 자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버지를 어떻게 섬길 것인지에 대해서 관심 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신자들은 아버지를 섬기는 자식으로 살기보다는 아버지의 것을 받아 누리는 자식으로 살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요구하는 것은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에 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신 아버지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앞서 말한 대로 세상과 일치하지 않는 삶입니다. 세상과 다른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과 다르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마지막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과 같이 현재에 서서 자기를 바라보기 때문에 세상 사람이 하는 것을 자기도 하고 싶고, 세상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자기도 갖고 싶어하게 되고, 그것이 곧 죄로 나아가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도 사람인 이상 세상에 좋아 보이는 것이 전혀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취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매여서 마지막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좋은 것에 취해서 마지막을 잊어버리면 결국 더 좋은 것을 향한 욕망에 사로 잡혀서 세상 사람과 동일하게 현재를 추구하는 죄로 나아가게 되버립니다. 그럴 때 세상과 다른 모습이 보여지지 않습니다. 의가 의를 포기하면 불의만 드러납니다. 빛이 빛이 되기를 포기하면 어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벗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우상으로 채워져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겠습니까? 결국 우상의 하수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사단이 조화할 수 없고 성전과 우상이 일치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사는 방식이 따로 있고 신자에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식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에 서서 세상 양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것으로 마음을 채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세상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마음이 하늘의 것으로 채워지기를 소원하며 살아가십시오. 현재가 유혹으로 다가올 때 마지막을 기억하십시오. 마지막때 남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신자는 마지막때 남은 자되기 위해 사는 것이지 현재를 잘살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16절의 말씀대로 하나님께 붙들려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을 풍부하게 보이는 신자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