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게 하자 (고후 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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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사람의 굴뚝 청소부가 굴뚝 청소를 마치고 내렸습니다. 한 사람은 얼굴이 깨끗하고, 다른 한 사람은 얼굴이 더러웠습니다. 두 사람 중 과연 누가 세수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답은 얼굴이 깨끗한 사람입니다. 상대방의 더러운 얼굴을 보고 자신도 얼굴이 더러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 더러운 사람에게 '당신 굴뚝 청소하고 얼굴이 더러우니까 씻어야 되겠다'라고 하니까 '더럽긴 뭐가 더러워 거짓말하지 마라'고 합니다. 상대방 얼굴이 깨끗한 것을 보고 자신의 얼굴도 깨끗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현재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가 자신의 현재의 얼굴을 모르고 있습니다. 세수를 한 사람이나 세수를 하지 않은 사람이나 동일하게 자신의 얼굴을 알지 못한 채 다만 상대방의 얼굴을 기준으로 해서 자기를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린 기독교의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란 무엇인가? 라고 할 때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의 얼굴을 보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의 얼굴을 보고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 얼굴을 정직하게 볼 수 있게 하는 거울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이 기독교의 본질을 벗어난 채 주님을 찾는다면 그 누구도 기독교가 담고 있는 진리에는 접근도 못해본 채 자신이 주님을 믿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필요로 한 사람은 자신이 누군인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어준다고 말을 한다면 적어도 자신의 죄가 무엇인가는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는 자신의 실체도 알지 못하면서 주님의 이름을 떠벌리고 있을 뿐입니다. 진리를 말하면서 진리가 없는 기독교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을 소망한다고 하면서 천국은 없이 천국의 환상만 잔뜩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기독교에, 또는 신자들에게 진리를 말하고 천국을 말하면 거짓말이라고 하고 엉터리라고 일축해 버립니다. 자기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라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을 깨끗케 하자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깨끗케 하자는 것은 지금 너희는 더럽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앞으로 더러워지면 깨끗케 해야 한다는 말도 아니고 지금 깨끗한데 앞으로도 계속 더러움을 피해서 깨끗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바울은 인간의 상태를 육과 영의 온갖 더러움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말을 듣고 자신을 깨끗케 하기 위해서 뭔가 방법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이겠습니까? 바울의 말대로 자신이 더럽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만약 '나는 깨끗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깨끗케 하자는 말을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구원이란 자신의 더러움을 아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구원은 심판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하는데, 자신의 심판도 알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갈 3:22절에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죄 아래 있는 것이 세상의 실체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죄에서 우리를 해방할 분은 그리스도 한 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그는 주님만을 자신의 희망으로 삼고 살아가게 됩니다.

신자는 자신을 깨끗케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는 약속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1절에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라고 합니다. 이 약속이란 16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는 약속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작정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전된 신자로서 요구되는 것은 거룩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할 성전도 마땅히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더러운 것으로 보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함께 하여 살아가는 것이 곧 더러움에 거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을 깨끗케 하여 거룩을 이루는 것이란 스스로 착한 일을 해서 자신을 죄를 씻어 가는 차원의 깨끗함이 아니라 세상의 사고방식과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사고방식과 함께 하여 살아가는 자신의 더러움을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이상한 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 부흥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왜 잘못이냐? 세상의 복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왜 잘못이냐? 라는 반발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끄집어내었다는 것은 애굽이 살아가는 삶이 따로 있고, 하나님의 백성된 이스라엘이 살아가는 삶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전은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는 삶의 방식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의 삶의 방식은 돈을 믿고 양식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말씀을 믿고 삽니다. 영생에 소원을 두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로 채워지기 위해서 자신을 비우는 삶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곧 성전입니다.

더러운 행위가 있어서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행위를 기준으로 해서 더럽다 깨끗하다를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은 더러운 행위가 있기 이전에 이미 더러운 자입니다. 속이 더러운 것입니다. 육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육과 영이 더럽습니다. 더러운 마음에서 더러운 행위가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속을 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더럽다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더러운 곳에서 나오라고 한다면 벌컥 화를 낼 것입니다. 특히 '가장 깨끗하고 가장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목회자들에게 '육과 영의 더러움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십시오'라고 한다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자신의 더러움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피보다는 교인 한 사람이라도 더 교회에 나오게 되는 것을 원하고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더러움의 기준이 행위가 아니라면 깨끗함의 기준 역시 행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즉 착한 행위를 보고 선하다는 판단을 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해서 깨끗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착한 일은 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를 힘들게 만듭니다. 우리에게는 착한 일의 한계가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무한정으로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선에 올라가면 한계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럴 때 착한 일을 더 하고 싶은데 힘이 없어서 더 이상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실망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깨끗함은 더러움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입니다. 더러움 안에 있으면서 깨끗해 질 수 없습니다. 더러움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깨끗해지는 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이 살아가는 사고방식처럼 자기 생존에 매달리지 말고 성전 되어서 성전답게 살아가는 삶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3절에 "내가 정죄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로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정죄하기 위해서 그들을 더럽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나도 더러움에서 빠져 나와야 할 사람인 것처럼 당신들도 더러움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영생을 위해서 살아가자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신자는 거룩을 이루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리고 거룩은 더러움에서 빠져 나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러움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더러움에 안주하고 더러움에 파묻혀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할 성전으로서의 자신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채 다만 세상에서 살아갈 일에만 관심 두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모습이 아닙니다. 빠져 나온 자로서 거룩을 보여주는 신자로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