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근심 (고후 7: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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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어떤 일로 인해서 기뻐하는 것은 그 일이 자기에게 만족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입니다. 만족 없는 기쁨은 없으며 만약 만족이 없이 기뻐한다면 그것은 기쁜 체 하는 것이지 만족에서 나온 기쁨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으로 기뻐한다는 것도 같은 말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 것은 나는 기쁘지 않으려고 하는데 복음 쪽에서 강제로 기뻐하게 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이 만족으로 다가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 것은 복음으로 인해서 최대한의 만족으로 누리기 때문에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믿음입니다.
복음으로 인한 만족은 세상에서의 부족을 물리칩니다. 아무 것이 없어도 복음이 있음으로 웃을 수 있는 사람되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와 같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되는 것입니다.
세상 것이 없다고 해서 근심하고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은 결국 복음이 그 마음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위해 피흘리신 주님의 그 고귀한 피가 전혀 그 마음을 적시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 것이 없음으로 인해서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머리 둘 곳이 없이 사셨던 예수님이나, 예수님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많은 고생을 하고 결국 주님 때문에 하나 둘 죽어갔던 사도들이나 방금 말한 대로 세상 것이 아무 것이 없어도 여호와로 기뻐한다는 선지자의 말을 들으면 그들은 우리와 다른 특별한 사람이다라고만 생각해 버립니다. 그들이 주님으로 기뻐하고 여호와로 즐거워했던 삶을 사모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나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치부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까지 우리 마음 한구석에 세상 것으로 만족과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욕심이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기쁨은 보이는 것으로 채워지는 기쁨이 아닙니다. 이러한 기쁨은 보이는 것이 사라질 때는 기쁨도 같이 사라지게 됩니다. 또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기대하는 욕심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기쁨은 사라지고 다시 불만으로 뒤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주는 기쁨은 보이는 것으로 채워진 기쁨이 아니라 보이는 것에 대한 욕구가 비어진 그 빈 마음에 보이지 아니한 것으로 채워지게 될 때 몰려오는 기쁨인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복음을 말하면서 정작 복음의 기쁨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은혜가 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를 깊이 인식할 때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알고 복음의 기쁨을 맛본 신자는 근심의 차원이 달라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중심은 근심입니다. 10절에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근심을 세상 근심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구분 짓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근심은 온통 세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들은 근심이 주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자들에게 세상에서 잘살고 못살고는 이미 근심의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생명이 아니다는 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순종하며 사느냐 아니면 벗어나 있느냐가 더 큰 관심거리이기 때문에 자연히 모든 근심은 믿음의 문제 때문에 발생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세상 것을 가지고 근심하지 말자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것으로 근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근심은 하고 싶다고 하고 하기 싫다고 해서 안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근심도 자연스럽게 그 방향을 달리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때문에 만약 여러분들의 근심거리가 모두가 세상적인 것으로 일관되어 있고, 믿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근심이 되지 않고 있다면 결국 여러분의 관심은 세상에 있지 주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세상 것으로 근심하고 있는 것 자체가 주님께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결과임을 알고 그 근심 때문에 근심한다면 관심을 주님께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요즘같이 바쁘고 할 일이 많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과연 어떤 근심에 파묻혀 있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바쁜 것 때문에 주님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문제로 통회하고 자복하면서 근심한 적이 있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사람들은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주님과 멀어진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세상의 바쁜 것 때문에 주님께로부터 멀어지는 듯한 자신이 발견되어질 때 그것으로 마음 아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 한 자라야 할 수 있습니다. 신자의 마음속에는 성령이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신자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그런데 정작 신자된 사람이 그리스도와 멀어질 때 성령이 우리 안에서 탄식을 하십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탄식하시고 간구하심으로 성령이 함께 하는 신자는 자신이 주님과 멀어진 것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요 성령이 하도록 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도 내가 믿음이 있어서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내 속에서 탄식하시고 기도하시기 때문에 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고자 하고 자신이 주님과 멀어지는 것은 아닌가하면서 자기를 돌아보고 점검하는 사람은 내 믿음이 좋아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서 나를 위해서 탄식하시고 간구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의 심령은 복음의 기쁨으로 채워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돌아보고 근심한다고 해서 신자되는 것도 아니고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것은 내가 주님과 멀어지는 것 때문에 근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이상하게 세상 것이 있고 없고보다는 주님과 멀어져 있느냐 가까워져 있느냐는 문제가 더욱 신경이 쓰이고 관심거리가 되어 있는 것, 그것은 나 자신이 이미 뭔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낸 것으로 인해서 후회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의 잘못에 대해서 강력하게 지적하는 자신의 편지 때문에 고린도 교회가 마음 아파하고 근심한 것에 대해서 후회한 듯합니다. 하지만 바울의 후회는 계속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편지로 인한 근심이 회개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한다는 증거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회개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의 결과는 성령의 개입이지 인간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의 계획에 쓰여지고 있을 뿐입니다. 성령은 여러분을 근심하게 합니다. 성령의 탄식과 같은 탄식을 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전하며 살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일에 나태한 자신을 점검하고 근심하도록 하시고 회개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나의 근심이 아니고 성령의 근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케 하는 것은 성령의 일입니다. 우린 단지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순종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