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의 기쁨 (고후 7: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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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두 가지의 근심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입니다. 세상 근심은 인간들의 마음이 세상 것에 의해서 압도당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을 비참한 인생으로 여기고, 자기로 하여금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죄악을 두고 슬퍼하고 근심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런 근심이 회개를 이루는 근심이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근심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세상의 문제 때문에 근심하고 걱정에 빠져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걱정을 하되 그 걱정이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음을 생각하고 그것을 근심하자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붙들고 있는데 은혜를 무시하고 세상 것으로 걱정하고 있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자꾸 떨어져 나가는 자신을 두고 근심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하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근심이기보다는 세상에서 먹고사는 것이 더 큰 근심이고, 걱정거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임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에게도 근심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의 근심은 과연 무엇으로 인한 근심이었겠습니까? 12절에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고 하시는 말씀을 보면, 바울의 근심은 온 교회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의 근심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쓴 것은 불의 행한 자나 불의 당한 자, 즉 한 개인을 향한 편지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온 교회가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서 든든히 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죄에 대해서 아주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디도를 통해서 편지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혹 그들이 자신의 편지를 받고 마음이 상하지나 않을까 걱정을 했지만 디도가 와서 그 편지를 본 교회가 회개함에 이르러 간다는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한 것입니다. 그 기쁜 마음을 표현한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디도로부터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고 있는데 과연 무엇이 바울을 그토록 기뻐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 편지가 큰 효과를 내어서 고린도 교회가 회개했다'는 기쁨입니까? 누구라도 자신이 누군가의 죄를 지적하는 편지를 썼는데 그 사람이 편지를 받고 통곡하면서 회개를 하고 옛날의 나쁜 습성을 다 버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무척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자신이 쓴 편지가 효과가 있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일 수 있습니다. 즉 내가 저 사람을 회개하게 했다는데서 오는 성취감 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분명히 자신이 편지를 써서 고린도교회로 보냈고 그 결과로 고린도 교회가 회개하게 되었음을 들었으면서도 그 자랑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하나님에게로 돌립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쓴 편지의 문장력이 좋고 내용이 그들을 회개하게 할만큼 감동적이어서 회개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회개의 출발이 어디로부터인가를 안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로 하여금 자기 자랑으로 나가지 않고 하나님이 고린도 교회의 배후에서 하신 일을 바라보고 기뻐하고 감사하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바울의 마음을 살피면서 생각할 것은 출발점입니다. 신자는 어떤 문제를 대하든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려고 한다면 보여지는 것은 불신앙 뿐입니다. 본문의 경우와 같이 뭔가 결과가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자기 자랑과 교만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고, 결과가 좋지 않을 때는 낙심해 버리고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 한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면서 기뻐합니다. 자기가 한 일을 바라보고 기뻐하고 스스로를 대견스럽게 여기는 것은 성령이 함께 하지 않은 사람, 즉 불신자들의 모습입니다. 불신자들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보십시오. 모두가 다 자신이 잘 한 것에 대한 기쁨이고 자랑입니다.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말은 아무도 안합니다. 성령이 함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은 하지만 그 은혜는 하나님이 하셨다는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힘을 줘서 내가 이런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은혜로 출발하는 듯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자기로부터 출발하면서 은혜라는 명목을 하나 덧붙여서 듣기 좋게 만들고 있을 뿐입니다. 겸손을 가장한 교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아니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십시오. 과연 여러분의 몸이나 소유한 모든 것에서 하나님 없이 되어진 것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배후에서 하나님이 일하시고 여러분을 다루셨기 때문에 지금의 여러분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 자랑으로 돌려버리면 어떻합니까? 하나님이 내 배후에서 일하셔서 지금의 내가 존재하고 있음에 대해서 감사해야지요. 이렇게 사는 것이 신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이 그치지 않는 이상 신자의 기쁨도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의 기쁨과 감사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발생합니다. 나만이 아니라 내 형제를 바라보면서도 그 배후에서 일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일을 발견할 때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배후에서 일하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활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고 땀흘려 일하는 것은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일해서 이러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죄악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죄를 범하고 바울의 편지로 인해서 근심한 모든 것을 가지고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배후에서 하나님이 그 전체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죄만 바라보았을 때는 기쁨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근심 가운데서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를 쓴 후에도 후회를 했습니다. 그 편지가 고린도교회에 근심이 되게 했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배후의 하나님이 일하심으로서 전체가 어울려져서 구원에 이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세상 일로 왜 근심하고 걱정합니까? 전체를 보지 않고 부분적인 하나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으면 당장 눈앞의 그 하나만 봅니다. 때문에 남는 것은 근심이고 걱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하나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목표를 두고 우리의 인생 전체를 그 목표를 향해서 움직이고 계십니다. 결국 부분적인 것만 바라볼 때는 좋은 결과가 있을 때만 감사하고 기뻐하지만 인생 전체를 바라보면서 산다면 좋은 결과이든 나쁜 결과이든 상관없이 그 전체가 나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되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기뻐하게 하고 감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일이 여러분 뜻대로 안됩니까? 실망하고 낙심만 하지 마시고 조용히 처음부터 다시 출발해 보십시오. 내가 누구로부터 출발했는지, 그리고 내가 어떤 인간인지, 하나님은 지금 무엇을 위해서 일하시는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는지, 세상 마지막 때까지 남을 것은 무엇인지, 내가 처음부터 현재의 것을 소유하고 있었는지, 그런데도 내가 세상 것으로 근심하고 낙심한 것이 과연 하나님 앞에 옳은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빈몸으로 온 인생이 지금 빈 몸이 아니라면 이미 은혜는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다가 더 많은 것을 보태려고 하니까 지금의 것으로 은혜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죽어야 할 인생이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 그것으로 이미 말할 수 없는 은혜의 충만함을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다른 것을 보태려고 합니다. 그래서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고 감사가 감사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로 기뻐하는 바울을 생각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인생을 부분적이 아닌 전체로 봅시다. 그럴 때 여러분은 지금의 모든 나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게 될 것이고 그것이 여러분을 감사로 인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