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은혜 (고후 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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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무시하고 있는 곳을 교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유일한 진리이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생명이라고 매주일 외쳐대는 교회에서 오히려 말씀이 무시를 당하고 배격을 당하고 있는 이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그러면서 스스로는 말씀을 경배하고 있다고 잘난체 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말씀을 전혀 두려워하고 있지 않으면서 말씀을 두려워한체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만 사랑한체 떠벌리고 있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부자 되기 위해서 안달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부리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돈이 없으면 죽고 못살 듯 야단법석들입니다. 세상 사람은 둘째 문제고 교회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재정이 조금만 부족하다 싶으면 '그래가지고 어떻게 복을 받겠느냐'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교인들을 들들 볶습니다. 하나님은 돈을 가지고 오라는 말씀을 전혀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돈 바치는 것을 좋아하는 신으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그들이 과연 지옥을 두려워하고 있고, 말씀을 경외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는지 궁금합니다. 그들은 지옥 보낸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돈을 향해 달려갈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주님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합니다.

이번 주간이 고난주간이라고들 합니다. 이 기간 동안에 교회에서는 금식을 하면서 주님의 고통을 느끼고자 하고 발을 씻는 의식을 하면서 주님의 섬김을 배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의식을 아무리 한들 주님의 고난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배 두드리면서 세상 좋아라고 사는 사람이 한 주간 금식했다고 해서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새롭게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큰 예배당을 바라보고, 수많은 교인들을 바라보고, 매주일 하얀 봉투로 가득히 넘치는 헌금통을 바라보면서 미소 짓고 의기양양하는 목사들이 머리둘 곳이 없이 사신 예수님의 외로움을 꿈엔들 알겠습니까? 사순절이라고 하면서 40일 특별 새벽기도회를 하고 주님의 고난을 묵상했다고 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셔야 했던 주님의 마음을 알 수나 있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고난주간은 교회가 만들어 낸 주간이지 주님이 만드신 주간이 아닙니다. 고난주간에 그 어떤 고행을 하고 고생을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깨달아지고 체험되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까지 버림받은 주님의 고난을 어떻게 고난주간에 행하는 몇가지 행사들로 알 수 있겠습니까?

고난주간이라고 해서 특별히 해야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습니다. 우린 단지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볼 뿐입니다. 그러다가 주님이 은혜주시면 십자가가 깨달아질 뿐입니다. 알고 싶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요, 체험하고 싶다고 해서 체험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고난주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아니라 내 자신이 얼마나 주님께 가까이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살펴보면 우린 너무나 주님께로부터 멀어진 채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주님은 이웃을 위해서 사셨는데, 우린 자기만을 위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본문은 헌금을 독려할 때 많이 사용하는 구절입니다. 환난과 극한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였다는 이 구절은 목사들에게는 회심의 미소를 짓게 하는 구절이고 교인들에게는 덮어버리고 싶은 구절일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요즘같이 경제가 어렵다고 해도 헌금은 넘치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마게도냐 교회가 환난과 극한 가난 속에서도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하기 위하여 풍성한 연보를 했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마음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구제라는 것은 교회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믿는 사람들도 또 다른 종교의 사람들도 많이 하는 것이 구제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하는 구제의 공통점은 우선 자신이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을 때입니다. 내 배고픈데 남의 배를 채워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부터 채우고 여유가 있을 때 남을 돌아보는 것이 세상의 구제입니다. 내가 즐거워야 하고 내가 행복해야 하고 내가 보람을 느껴야 남을 돕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의 공통점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나 신자들의 구제도 결국 이 범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배당 짓기 위해서 교육관 짓기 위해서 구제비를 감축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입니다. 그럴 때에 마게도냐 교회의 환난과 극한 가난 속에서의 풍성한 연보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게도냐 교회가 세상과 다르게 환난과 가난 속에서도 어떻게 풍성한 연보를 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런 행동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은혜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 은혜가 연보로 표현되었을 뿐입니다. 헌금을 많이 했구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풍성히 알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돈이 많아서 돈이 나온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돈을 바쳤다고 해서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돈을 수억을 바쳤다고 해도 그것을 자기 자랑으로 삼고 힘으로 삼는다면 그 사람은 돈을 바친 것이지 은혜를 내어놓은 것이 아닙니다.

5절에 보면 "우리가 바라던 것 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라고 말합니다. 여기 보면 사도 바울은 돈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몸을 받았다고 합니다. 극한 가난 속에서도 자기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이웃을 위해서 연보를 했다는 것은 이미 자기 몸을 주께 드렸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이 아니라 몸을 받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하여 자기의 몸을 바칠 수 있었습니까? 6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 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은혜를 성취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1절에서 말하는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라는 말과 연결됩니다. 마게도냐 교회라는 것은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교회를 가리키는데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모습을 고린도 교회에 말하는 이유는 마게도냐에 나타난 은혜가 고린도교회에도 성취되기를 바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오늘날 우리들에게서도 마게도냐의 은혜가 성취되기를 바란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게도냐와 같이 환난과 극한 가난이라 할지라도 헌금을 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알자는 것입니다.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합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이 깨달은 주님의 은혜는 부여하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고 대신 우리가 부요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았기에 몸을 주님께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어려운 교회를 위해서 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헌금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요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부요하신 분이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우리를 돈 많은 부자로 만드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악 많은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으신 가난이고, 주님의 그 죽으심으로 우리는 믿음의 부요함을 누리게 된 부요입니다. 돈이 있어도 만족하지 못하면 그것은 가난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를 받은 신자는 주님으로 만족합니다. 그것이 부요입니다. 그럴 때 그 신자는 자기를 비워 이웃을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믿음 없음을 드러내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헌금해야지'라는 생각을 가졌다면 그것은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몸이 지금 나를 채우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감사할 때 그 감사가 여러분을 은혜를 성취하는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